2011년 6월 6일 월요일

내막을 간파해야 국민이 살 수 있다.

내막을 간파해야 국민이 살 수 있다.








글 쓴 이 : 최우원 등록일 : 2011-06-03 21: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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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막을 간파해야 국민이 살 수 있다.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최우원













반인류 범죄 집단학살 흉악범 김정일은 애초부터 대화 상대가 절대 아니고 국내 법정이든 국제 법정에서든 처단 제거되어야만 하는 악 그 자체입니다.





평화협정이라는 공산당의 위장평화전술에 속아 넘어간 베트남이 월맹에게 적화점령 당해 없어지고 천만 명이 학살당한 불과 36년 전의 역사를 우리 국민들이 기억하며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그랜드 바겐이니 뭐니 하면서 여태까지 저렇게 정상회담에 집착한 저의가 무엇일까요!





자식을 살해당한 아버지가 흉악 살인범을 몰래 찾아가 큰 돈뭉치를 내밀며 제발 사과하는 척만 해주고 공개적으로 만나 달라 그러면 살인 범죄도 그냥 넘어가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서 듬뿍 바치겠다고 애걸하다가 살인범에게 꼴사납게 퇴짜 맞으면서 욕도 먹고 뺨도 실컷 얻어 터졌다면 그 아버지와 그 집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대번에 병신이라는 소리와 우리 동네에서 꺼지라는 함성이 터질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흉악 살인범 김정일에게 정상회담을 구걸하다가 폭로당한 사건은 우리 대한민국의 국가 품격을 형편없이 망가뜨린 중대 사건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 국가들의 안목에서 본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이 독립과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는 나라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힘이 빠지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반면에 김정일의 노비 간첩단과 반역좌익들에게는 힘과 사기를 올려주면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정신박약아가 아닌 이상 저 따위 일을 할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최고 권력 청와대가 저 지경의 일을 벌였을까 이해가 안 되실 것입니다.





정확한 해답은 청와대 트로이 목마에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최고 권력 핵심부에 숨어 있는 세작은 내부의 힘을 빼고 와해시키면서 외부의 적을 보이지 않게 돕고 키워주는 간악한 공작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외부의 적은 자기들 세작이 의심받지 않고 공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 세작을 비난하거나 고육지계를 구사하거나 할 것입니다.





2012년의 위기 정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현 상황의 내막을 파헤쳐보면 소수의 반역좌익 학생 운동권 출신들과 대다수 국민의 대결입니다.





저 간악한 반역좌익 운동권 출신들은 북의 지원과 지도하에서 조직적으로 성장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고 노비문서 충성 서약문을 썼기 때문에 김일성, 김정일의 평생 노비입니다.





약 4만 명으로 추산되는 저것들의 숫자를 보면 전혀 상대가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 분야에 포진해 있고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절대 대다수 국민들이 위기의 내막을 모르고 있고 따라서 조직도 되어있지 않은 지금과 같은 무대책, 무방비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제 2 베트남 꼴이 될 위험이 큰 것입니다.





김정일의 노비 반역좌익 운동권 출신들이 여야정치권과 TV방송을 장악하고 있으니 6백만 명 이상의 북한 동포를 집단 학살한 반인류 살인범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이라고 깍듯하게 예우하면서 대통령 이상으로 동정을 보도하며 우리 국민을 세뇌하는 해괴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고 또한 사악한 반역조직 전교조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어린 학생들에게 빨갱이 물을 들이느라 눈이 뒤집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애국진영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가치를 당당하게 내세우며 국가위협 분자 제거에 나서는 당도 대통령 후보도 전혀 없는 상태로 있으니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한들 힘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간악한 김정일이 노리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 무릎을 꿀림으로써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한편 국민들 모르게 자기의 노비들로 대통령 후보군을 채워버리면 자연히 대한민국은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 김정일의 흉계입니다.





여야정치권과 언론계가 김정일의 노비 조직에게 장악당해 있고, 행정조직도 상층부는 자치단체장 선거 이후 낙동강 전선만 남아 있는 가운데 하층부는 전공노가 주민 장악, 길들이기에 나서는 상하 협공의 상태이고, 교육계 역시 상당수 빨갱이 교육감들이 전교조와 발맞추며 빨갱이 교육에 골몰하고 있는 이런 지극한 위험 지경에서 우리 애국진영이 국가를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절대적 다수 국민들의 잠을 깨워 현 위기 상황의 내막을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김정일과 그 노비들의 간악한 사기, 위장, 기만전술에 넘어가 죽음의 함정이 발밑에 와 있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국민을 깨울 수 있는 최고 특효의 기폭제는 연천 구미리 남침땅굴 12킬로미터 절개와 전자개표기 사기극 가짜 대통령 노무현 사건 공개, 연천 530GP 사건 진상 날조 사실 공개라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연천 구미리 남침땅굴이 절개되어 공개될 경우 지하 38미터의 갱도 열차를 타고 12킬로미터를 달려서 DMZ 바로 밑에까지 갔다 온 사람들 중에 국가 안보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무서운 남침땅굴을 내리 3 정권에서 11년 이상 은폐해 온 사실로 보아 남침땅굴들이 이미 오래전에 서울 한복판에 침입해 거미줄 같이 퍼져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전자개표기 사기극 가짜 대통령 노무현 사건이 공개된다면 모든 국민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범죄조직화 되어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여야정치권 전체가 김정일, 김대중에게 완전 장악당해 사후 공범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경악 졸도하게 될 것이며 국가 안보 위기가 어느 지경에 와 있는지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2005년 6월 19일 북괴군 도발에 의해 8명의 장병이 전사한 연천 530 GP 피격 사건을 빨갱이 노무현 정권이 김동민 일병의 우발 범행으로 날조하여 군과 국민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무서운 분노가 빨갱이들을 향해 폭발해 나올 것이며 국가가 무너지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국가에 치명상을 입히는 이러한 중대한 사실들이 명백히 다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야 정치권과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기피하고 언론이 입을 닫은 가운데 장기간 은폐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증거 인멸까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 국민들이 현재 위기의 내막을 알아차리고 힘을 결집해 음모 분쇄에 나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애국 진영이 국가 존속과 국민 생존을 결정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야 정치권과 언론계가 김정일의 노비 조직에게 장악되어 있는 상태에서 국가를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국민들이 내막을 간파함으로써 기존 정치권에 대한 기대를 털어버리고 직접 전국에서 의병조직을 결성해 나서는 길 뿐입니다.





국가 위기 상황 앞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오히려 6. 15 반역선언에 찬성한다는 후보, 반역좌익 운동권에서 골수 핵심으로 수십 년 활동하다가 돌아섰다면서 전향한 시늉은 열나게 하지만 과거의 반국가 조직과 전력은 전혀 내놓지 않는 제 2 트로이 목마 후보, 이런 사람들에게 기대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허송하다가는 김정일이 낙점한 좌익 뻐꾸기가 당선되고 나라가 김정일에게 접수되어 무너지는 참극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이미 처단돼 사라졌어야만 하는 반역좌익들이 척결되기는커녕 거꾸로 힘과 돈이 붙으며 갈수록 더 활개치고 있고 반면에 애국진영은 갈수록 돈이 쪼들리며 위축되는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사악한 트로이목마 작전과 연이은 뻐꾸기 작전이 모두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애국 진영은 가능성으로 보자면 사람 수나 동원 자금이 좌익을 압도할 엄청난 규모이겠지만 집권 빨갱이들의 차단 공작, 내부 프락치의 분열 교란 공작에 농락당해 왔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핵심 조직이 없어서 힘을 발휘하지 못해온 것입니다.





절대 다수 애국 국민의 화산 폭발 같은 엄청난 힘을 이끌어낼 새로운 핵심 조직의 으뜸가는 절대 조건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과 정의, 애국심, 법에 입각한 당당하고 강력한 노선입니다.





확실하고 강력한 애국정당 국민의병당을 창당할 것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국민의병당이 가는 길은 정의와 애국과 법 실현의 길이므로 당당하고 강력한 길인 것입니다.





국민이 스스로 일어나 국가 위기를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선진강대국의 큰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 위기에 분노하여 스스로 일어난 우리 국민은 반역좌익, 썩어 문드러진 정치권을 일소하고 세계 제 1 선진강대국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갈 것입니다.





국민의병당은 다음의 특단 조치들을 반드시 실현합니다.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필수적 조치이며 진실, 정의, 법에 근거한 조치입니다.







1. 민족반역 범죄 집단 김정일 북한을 전 세계로부터 고립시켜 붕괴시키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의한 통일을 성취한다.





2. 민족반역자 악마 김정일과 그것의 노비 김대중, 노무현, 주사파 일당이 꾸며온 6.15 선언, 10.4 선언, 평화협정, 반역 개헌 음모를 철저히 분쇄하고 국법에 따라 처단한다.





3. 미국과의 혈맹관계를 회복하고 한미연합사령부를 복원한다.





4. 수 백 조 원을 훨씬 넘는 김대중, 노무현, 반역좌익 일당의 국고 도둑질 비자금을 국내외로 추적하여 즉시 몰수하고 민생 살리는 기금으로 활용한다.





5. 2002년도 제 16대 대통령 선거 전자개표기 사기극 가짜 대통령 노무현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여 범죄조직을 처벌한다.





6. 5.18 광주사태에 북괴군 특수부대가 침투하여 무장폭동을 공작한 사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잡는다.





7. 이미 11년 전에 발견되었으나 반역정권들에 의해 감춰져온 연천 구미리 남침 땅굴을 즉시 절개하여 공개하고 아직 찾지 못한 수십 개 남침땅굴들을 수색하며 군과 정부 내의 남침땅굴 은폐 간첩조직을 박멸한다.





8. 2005년 연천 530GP 사건의 진상을 은폐, 날조한 범죄조직을 철저하게 수사하여 군과 국민을 이간질한 반역죄를 처단한다.





9. 김대중, 노무현 좌익정권 10년 동안에 저질러진 국가반역사건들에 대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한다.





10. 국가를 갉아먹어온 암세포 반역좌익단체 전교조, 전공노, 민노총을 전원 파면, 해산, 형사처벌하고 그 자리에 건실하고 능력있는 국민들을 임명하여 30만 명의 일자리를 제공한다.





11. 세계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악의 소굴 김정일 깡패 정권의 폭압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북한동포를 구출하기 위한 “북한동포 해방운동”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실시한다.





12. 미래의 희망 청소년들의 가슴에 위대한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무궁한 애국심과 긍지가 흘러넘치도록 올바른 국가관과 Noblesse Oblige 정신을 철저히 심어주고, 모든 공직자의 국가관을 재검증하여 암약하고 있는 빨갱이 프락치들을 처형하고 국가관이 박약한 기회주의 공직자들을 파면한다.







우리의 위대한 국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자랑스러운 오늘날의 번영한국을 이룩하여 주신 애국선혈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반드시 승리합니다.





위대한 국가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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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 교수, '영화계 좌파가 장악했다'

조희문 교수, '영화계 좌파가 장악했다'




북한은 왜 뿔딱지를 냈는가?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서울대 법인화를 놓고 학생들의 반대가 벌어지면서 난장판이 된 서울대 본관. 학원가 선동인가?



조희문 교수, "한국 영화계, 좌파가 장악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전 위원장인 조희문 교수(54·인하대 연극영화학·사진)가 계간 '시대정신' 여름호에 발표한 논문 '한국영화: 문화와 운동, 정치의 경계'에서 "우파 정권이라 믿은 이명박 정부가 3년을 넘기고 있지만 문화예술계는 좌파가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파의 이념적 공유, 조직, 실행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거나 무력한 수준"이라며 "좌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대표적 분야가 바로 영화다. 스타급 감독이나 배우, 시나리오 작가, 음악가, 제작자, 기획자들 중에서 좌파적 성향을 보이는 사례가 많다"는 주장을 했다고 뉴시스가 전했다.



조희문 교수는 2010년 제63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시'를 언급하며 "이창동 감독이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좌파 문화정책을 주무했던 경력이나 봉준호 감독이 민노당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며 "혹시나 이들의 지나친 이념적 성향을 비판하기라도 한다면, 또 자신들이 지원이나 대우에서 조금이라도 차별받았다고 느낀다면, 이들은 아직도 '문화 예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부정하는 수구 보수의 만행'이라며 날을 세운다"고 밝혔다고 뉴시스가 전했다.



조희 교수는 노무현의 문화계 좌익화으이 주역이라고 밝혔다. 조 교수는 "노무현 정권 5년은 좌파 문화예술을 주류 세력으로 고착하는 단계로 만들었다. 노 대통령 정권이 끝났을 때 문화예술계의 지형은 완전히 좌편향 일색으로 변해 이들이 사실상 중심을 차지했다"고 단언하면서 "문화예술계 전부가 이념적 좌파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설령 좌파적 가치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비난할 수도, 규제할 수도 없다. 한국 영화계가 이념을 넘어 견제와 균형, 조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문을 했다고 뉴시스가 전했다. 이는 김제동, 김미화 등이 블랙리스트 논쟁을 하면서 차별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북한은 왜 남북대화에 뿔딱지를 냈는가?



북한이 남북 간에 논의된 정상회담 협상 내용을 노골적으로 공개한 것은 한국 정부에 톡톡히 망신을 안겨주겠다는 의도를 다분히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동아일보는 진단했다.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의 "(이런 폭로를 통해) 북한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자신들의 페이스로 남북관계를 끌고 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는 말을 빌려서, 동아일보는 "우리와 무관한 사건과 정정당당한 자위적 조치를 두고 사과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북한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북한이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사과를 전제로 한 남북한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동아일보는 봤다.



또 동아일보는 북한이 발작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국군이 예비군훈련장과 야전부대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김정은 부자의 사진이 붙은 사격 표적지를 사용한 데 대한 불만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그동안 정권 수뇌부를 겨냥한 비난에 대해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격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이 사격의 표적지로 사용되지 발칵했다는 점을 동아일보는 주목한 것이다. 또 동아일보는 "남북관계에 전례도 없고 국제관례에도 어긋나는 북측의 일방적 폭로는 남측 정부에 기습적인 강펀치를 날림으로써 남남(南南)갈등을 이끄는 효과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진단했다.



북한이 최근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체제 지원 약속을 받고 강한 태도로 돌변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며,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의 "북한이 북-중 정상회담에서 체제 보장을 받은 뒤 결단을 내린 것 같다. 미국이 대북 식량지원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강경한 대남 공세로 나설 자신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황당한 주장도 소개한 동아일보는 "중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 약속도 받지 못한 채 남북관계 개선 압박을 받자 이에 불만을 가진 북한이 중국을 겨냥해 대남 강경책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는 다른 전문가의 주장도 소개했다.



박지원 의혹제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2001년 1월 15일에 열린 ‘한빛은행 대출 의혹사건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 당시에 야당이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증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공세만 펴자 증인석에 앉은 박지원 현 민주당 의원은 "이것은 청문회입니다. 저희(증인)들 인권도 보장돼야 합니다. 국민이 보는 앞에서 (의원들이)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저희 답변을 봉쇄한다면 그건 ‘정치 발표회’지 청문회가 아닙니다"라며 가슴을 치고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억울해했다고 중앙일보가 전했다. 한빛은행으로부터 불법 대출자가 "내가 박지원의 조카"라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한나라닫이 청문으로 따진 것이다. 당시 사법부는 김대중 정권의 실세인 박지원에 관련된 불법 대출을 "강한 의심이 든다"면서도 단순 사기사건으로 판결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 인사들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박지원 의원은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삼화저축은행의 사외이사로서 왜 (삼화를) 부산저축은행에 인수시켰는지에서 부산저축은행의 부실이 시작된다. 정 정무수석과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은 밀접한 관계로 둘이 우정힐스골프장과 청담동 한정식집에 같이 다닌 걸 확인했다"며 정 수석을 문제있는 사람으로 낙인찍어 의혹을 제기했다고 중앙일보는 지적했다. "삼화저축은행을 부산저축은행이 인수했다는 건 사실이 아닌 만큼 틀린 정보를 가지고 정 수석을 공격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중앙일보는 꼬집었다.



중앙일보는 "정 수석이 (저축은행 비리를 국정조사할) 청문회에 나오고, 그사이 그에 대한 결정적인 문제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 정 수석은 10년 전의 ‘증인 박지원’처럼 억울함을 호소할 게 틀림없다"며 10년 전 박지원 의원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겨냥해 "느낌(심증)을 가지고 질의하신다고 하는데, 저도 느낌을 가지고 답변드리자고 하면 (할 말이) 참 많습니다"라는 말을 보도했다. 중앙일보(남궁욱 기자)는 "박 의원은 이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대여(對與) 공세의 선봉에 선 그가 버려야 할 건 ‘느낌’이다. 그리고 찾아야 할 건 ‘진실’이고, 내놓아야 할 건 ‘증거’가 아닐까"라며 박지원 의원의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너가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태도를 꼬집었다.[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hursuaby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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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6/02 [10:48] 최종편집: ⓒ 올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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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광주사태 연구가





박정희대통령 암살음모꾸몄던 광주일고 동문(박형선)의 금융 비리

작성: 역사학도 2011년 5월 31일 화요일 오전 3:15



광주운동권이요, 윤한봉, 윤상원,정찬용, 윤강옥 등과 더불어 광주사태 주동자로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인 박형선이 부산에서 저지른 저축은행 비리 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김홍일 검사장)는 5월 27일 (2011년) 불법대출에 관여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으로 부산저축은행 2대 주주인 박형선(59) 해동건설 회장을 구속했다. 그런데 박연호와 박형선 등 광주일고 출신들이 부산에 가서 저지른 이번 비리 사건은 그 뿌리가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매일이 편찬한『正史5・18』에 따르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극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나상기(농민문제연구소장, 당시 KSCF), 박석률(서강대 배후조정), 김경남(민중신학 계열 목회자, 당시 한국신학대학 재학), 윤한봉, 김상윤, 김정길(전남민주연합집행위원장) 윤강옥(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처장), 이강, 정찬용 등 광주운동권19명과 인혁당재건위 조직원 2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4). 그런데, 이 광주운동권이 광주일고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청학련과 남민전 사건과 광주사태 주동자들 중에 광주일고 출신들이 많았던 사연은 이러하다. 4.19 때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친 김일성은 1960년대 중반에 김종태 등 몇몇 운동권을 북한으로 데려다가 훈련시킨 다음 남파시켜 전라남도와 서울을 거점으로 통혁당을 창당케 하였다. 통혁당이 서울에 학사주점을 설립하고 대학생 포섭 활동도 많이 하였지만,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던 학교는 광주일고였다. 광주일고 6회 때부터 광랑이란 운동권 서클이 있었는데, 이 광랑이 통혁당이란 지하당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으며, 광주운동권을 배출하였다.



1. 인민혁명당과 광주일고 동문의 연결고리



이번 저축은행 비리 사건의 장본인 박형선의 처남이 바로 광주일고 동문이자 5.18기념재단 설립자인 윤한봉이다. 따라서 이번 비리 사건은 5.18기념재단 설립자 및 운영자들 친인척의 도덕성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조희연에 따르면, 통혁당은 개개인을 세미나에 참여시켜 기초적 교양을 하는 과정에서 잠재력이 있는 인자가 발견되면 '심화학습'(원전 혹은 북한 책 등)을 통해 통혁당 조직원으로 참여케 하였다 (조희연 1990, 110). 그런데 윤한봉은 정말로 광주일고 선배들 중에서 정말로 가방에 그런 불온한 이념 서적들을 담고 다니며 광랑에서 그런 심화학습을 받다가 통혁당에 참여한 운동권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인자 그 광랑이 빛 광자 광주사내, 사내 랑자 해가지고. 광랑이라는 서클이 있는데, 이 광랑이라는 서클이 6회인가에 선배들에 의해서 6회 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6회, 6회들이 만들었어요. 근데 이제 그 광주사내들의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이제 학습을 하는데 독서회 같은 거니까. 당시로는 아주 불순한 공부들을 했다고. 그래 가지고 여러분들이 들어서 알랑가는 몰라도 쿠바인의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서 맹비판을 한 리슨 양키라는, 양키야 들어라 뭐 그런 책이 4.19 이후에 출판이 됐었다고요. 금서로 돼 있다가. 그런데 5.16 쿠테타가 나면서 다시 금서가 됐지. 그게 일반인들과 접촉이 안 되는 책인데. 그런 책을 놓고 미제국주의의 진면목이 무언가를 공부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해갖고 어떻게 보면 쪼금 붉으스름했지. 그러니까 자기들이 자칭 사회주의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할 정돈데. 거기에 선배들 중에서 9회 선배가 이제 반공법사건 같은 걸로 좀 들어가고. 10회가 통혁당 막둥이로 어린 통혁당으로 해가지고 고생도 하고.



면담자: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구술자: 근게 9회 조용호, 김민혁, 아니 조용호씨가 이상한 책들 붉으스름한 책들 가방에 담고 기차 타고 내려오다가 비슷한 가방하고 바꿔 들고 나와 브렀어. 그래 갖고 인제 그 다른 사람이 집에 가서 본 게 이상한 책들이,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가지고 혼난 사건이고. 10회가 박경호 선배가 인자 통혁당 막둥이 들어갔는데. 거기에 인제 일고 14회, 그러니까 내 3년 후배들이 이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정상용, 국회의원. 5.18항쟁지도 대변인 아니 외무부, 외무부장 맡았었지. 이양현 거기도 5.18당시 그 기획의원으로 도청항쟁지도부 있었고, 김이택 그것도 이제 나중에 긴급조치로 빵잽이하고, 민청련 의장도 하고 그랬지. 지금은 공직에 가 있는데. 박영규, 영신이 김영신, 박영신, 그렇게 되고 이제 16회가 최철희, 19회가 정용화, 정용화도 5.18관련해서 그렇고.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 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1-2).



이렇듯 광랑에서 반미・친북・친공 이념으로 의식화된 광주일고 출신 중 10회에 통혁당 간첩단 사건 관계자들이 있었으며, 11회와 14회가 바로 광주사태를 일으킨 광주운동권이었다. 광주일고 운동권 서클 광랑의 출발점은 향토반이란 특별활동반이었다. 여기 몸 담았던 학생들이 광랑을 조직한 후 광랑이 향토반을 장악하였다. 광주일고 광랑 출신들이 전남대로 진학한 후 광랑 후신으로서의 민사련을 조직하여 전남대 학생활동을 장악하였다. 이렇듯 오늘날 5.18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전남대 운동권의 뿌리는 민주주의 철학이 아니라, 통혁당으로부터 전수받은 반미・친북・친공 이념이었다. 그 당시 현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과 더불어 민청학련 활동을 하다가 그의 처남이 된 윤한봉은 광주일고 광랑이 전남대 운동의 맥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면담자: 선생님 잠깐만요, 향토반이 일고에 있는 동아리죠?



구술자: 일고에 있는 일종의 동아리지. 특별활동 아니 동아리가 아니라 일종의 특활한 동아리지. 독서 발표 같은 거 하고 방학 때 농활을 했던 것이 향토반이야. 거기 최초의 향토반을 만든 사람이 지금 곡성군수 고현석씨에요. 6회들. 이사람 이외도 두 사람, 세 사람이 만든 건데, 이 광랑이 인제 향토반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좌지우지하게 된 거지.



면담자: 광랑은 일고생들의 모임인 거죠? 향토반 출신의 전남대생이 아니라.



구술자: 일고의 광랑이라는 독서서클이, 일종의 불온한, 요즘 말로 하면 서클이 있었는데 이 서클맴버들이 대부분 다 향토반에 들어가 있었지. 그래가지고 향토반에 영향을 줬지. 향토반 출신들이 또 많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는데, 이 광랑이 벌써 9회 조용호 선배가 감방에 가고 10회 박경호 선배가 감방에 갈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서클이었지. 요 출신들이 14회가 대거 전남대에 와가지고 정상용, 이양현이가 전남대에 민족사 연구회를 만들어요. 여기에 일고출신과 일고출신 아닌 사람들도 일단 요즘 말로 하면 사회과학 서클이야. 이념서클 같은거. 면담자: 민사련이요. 구술자: 그렇지. 민족사회연구회가 이 친구들이 중심이 돼서 전남대에 운동의 맥을 형성해. 그러고 이 사람들이 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교련반대시위 여기에 주축이 되지. 주도, 여기서 주도를 해요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1-2).



1971년 전남대에 민사련을 조직한 광주일고 출신 정상용, 이양현 등이 1980년 광주사태 때도 핵심 주동세력이었다. 1973년 광주일고 출신 전남생들이 대거 민청학련에 가입하게 된 데는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 조종이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을 광주운동권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북한측 당사자였던 거물 간첩 김용규의 시각에서는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었다.



평양의 대남공작기관이 직접 관리하였던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은 (김용규 1999, 285-289) “공산주의자들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 정부를 뒤엎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도했”던 사건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중에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와 안암동에서 하숙하다가 남파 공작원에 포섭되어 공작원이 마련해 준 원남동 하숙방에서 하숙하다가 평양에 가서 혁명학원에서 간첩 훈련을 받고 돌아온 서울 법대생이 있었다 (김용규 1999, 236-289, 300). 그 당시 남한에는 북한이 직접 관리하는 운동권 조직이 94개나 있었는데, 평양에 다녀온 운동권 수만 무려 백 명에 달했다 (김용규 1999, 303-305).



민청학련은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배후조종하고 있었고, 인민혁명당 재건위는 북한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당시 민청학련이 북한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박갑동은 김일성의 어록을 인용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서 미국이 왜 박정희를 지지하는가가 문제인데 그것은 그가 반공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신용은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민청학련이나 목사들은 북과 결부하려 하고 있습니다” (박갑동 2005, 98).



인혁당 재건위와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의 관계는 이러했다. 인혁당 이수병이 여정남을 지도하였으며, 여정남으로부터 받은 인혁당 자금을 들고 이철이 직접 광주로 내려와 윤한봉 등 광주운동권을 포섭하엿다. 인혁당과 민청학련의 관계를 김정래는 이렇게 기록한다:



2차 인혁당 조직은 1960년대 후반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변혁운동 내부에서는 1960년대 전반에 걸친 정치논쟁을 통하여 대오를 일원화하고 있었다. 지도부 건설은 고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추진되었고 경락연구회는 지도부 건설의 초기 단계에 해당되는 협의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지역별로는 서울 우홍선, 대구 서도원, 광주 김세원, 부산 000 이 조직을 분담하였으며, 학원·문화계는 이수병에게 위임되었다. 경락연구회는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추동하기 위하여 학생운동과 연계를 맺는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은 대구지도부에서 서울지도부로 파견되어 이수병, 김용원의 지도를 받아 민청학련 봉기계획에 착수하고 조직활동을 벌여 나갔다 (김정래 2011, 175).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극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나상기(농민문제연구소장, 당시 KSCF), 박석률(서강대 배후조정), 김경남(민중신학 계열 목회자, 당시 한국신학대학 재학), 윤한봉, 김상윤, 김정길(전남민주연합집행위원장) 윤강옥(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처장), 이강, 정찬용, 광주일고 동문 서울대 재적생 나병식 등 광주운동권19명과 인혁당재건위 조직원 2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4).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당시 민청학련 소속 광주운동권 전원이 광주일고 동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광주운동권’은 사실상 광주일고 광랑 출신 동아리였다. 따라서, 광주운동권은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였던 것이 아니라, 광주일고 광랑 시절부터 의식화된 반미・친북・친공 이념을 대표하고 있었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그갼의 운동권 주장과 달리 민청학련 배후가 인혁당 재건위였다는 것이 사실이었음을 당시 변호 의뢰를 받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1993년 인권변호사들끼리만 모였 좌담회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김형태 변호사: 그때 인헉당 사건의 여정남 등의 번론은 왜 안 맡으셨나요.



홍성우 변호사: 아이구, 그때는 나는 헉신계 소리만 들어도 떨릴 때였어요. 정말 그래서 민청학련 조직을 가능하면 인혁당과 떼어놓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때 이철이 여정남과 연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이돈명, 조준회, 홍성우, 김형태 (1993, 683).



지승호도 이철의 말을 인용하여 여정남과 민청학련이 접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임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대구경북 지역은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이철 전 의원도 ‘유신반대전국시위에서 대구 광주는 주요 거점도시였으며, 경북대와 전남대는 중요한 학교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고 여정남씨와 민청학련과의 접촉이 있게 된 것이고, 학생운동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유신으로 철퇴를 맞고, 73년 다시 복원이 된다” (지승호 2005, 173). 인혁당 마지막 생존자 임구호도 당시 학생데모 배후에 혁신계 선배들, 즉 인혁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인혁당 여정남 출신학교 경북대 운동권은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내린 지령에 따라 민청학련 사건을 초기에 주동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혁신계 선배들은 서울,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서로 왕래를 하면서 자기 지역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해서 논의들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저하고 정남이형 두 사람이 서울 올라가서 유인태, 서중석이를 만나서 서로 조직적 관계를 강화해서 앞으로 저항을 하는데 있어서 조직적으로 대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다음에 연계망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것까지 다 논의가 되죠. 이철은 군대 갔다가 복학해왔으니까 학생이고, 경북대학 같은 경우는 정화영이나 임규영이 학생이고, 학생은 학생끼리 교류를 하고, 이철하고 유인태하고 연계를 갖고, 정화영하고 저하고 연계를 갖고, 저는 이철을 만나지 않지만, 나하고 유인태하고 연계를 갖고 이런 형식으로 조직적 시스템을 만드는 거죠. 만들다가 73년 10월 2일에 서울 문리대 반유신데모가 있고, 11월 5일 경북대학교 반유신데모가 있는데, 이것은 조직끼리 연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서울 물리대가 먼저 해가지고, 그때 유언비어와 대남방송에서 이게 나오니까 우리가 이걸 빨리 따라잡아서 한판을 해야 된다고 해서 경북대에서 총동원을 해서 11월 5일 시위를 하게 되고, 그게 성공을 했어요 (지승호 2005, 174-175).



윤한봉도 여정남의 인혁당 동지들을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배후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 분들 중에서 한 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2-6).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 분들 중에서 한 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2-6).



1967년부터 1976년까지 대남공작원이었으며, 1999년에『소리 없는 전쟁』을 저술한 김용규는 그 시절 대부분의 운동권 단체들이 북한 자금 지원을 받거나 북한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고 기록하는바, 그 대표적인 단체가 인혁당이었다.



인혁당 여정남이 민청학련을 접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명백한 증거로서 김지하는 여정남이 유인태와 이철 등 민청학련 조직책들에게 직접 활동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든바 있다. 김지하가 말하듯이 “모든 조직운동은 자금이 가장 중요하다. 수사를 할 때 자금원이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김지하가 증언하듯이 민청학련 자금원은 인혁당이었다. 김지하는 그 자금은 “죽은 여정남씨가 유인태씨든가 이철이든가 막걸리값 하라고 준 것”이라고 증언한다 (지승호 2005, 184). 그 자금이 화폐 가치와 경제 수준이 다른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거액이 아닐 수 있겠으나, 이철이 전국 포섭 대상자들에게 푸짐한 연회를 제공할 수 있을 만한 자금이었다. 여정남이 한 두 사람이 아닌 전국의 그 수많은 운동권 막걸리값을, 당시로서는 꽤 큰 자금을 민청학련 조직책 이철에게 제공해 줄 이유가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윤한봉은 이철이 자신을 민청학련 광주 조직책으로 포섭하였을 때 여러 차례 푸짐한 술 파티를 제공받았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어떤 동시다발적인 시위준비를 하자 이런 요지였는데, 그게 인자 광주로 내려와 가지고 전남대의 인자 그런 역할을 책임 있게 대표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인자 당연히 끼리끼리 이 뭐야, 함성, 고발지 사건으로라든지, 이강씨 이렇게 접촉을 해 가지고, 김남주 등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 그래가지고 인자 내가 추천된 거지. 김정길이가 와갖고 날더러 한번 만나자 하드만 형님 어째 공부만 모범생으로 하실라요? 아니여 인자 나도 싸울 거여. 그래요? 그럼 한번 만나 보실라요? 좋다. 그래갖고 인제 만난 것이 이철이랑 나병식씨, 황인성이, 이런 친구들이 내려왔었는데, 그래갖고 인자 만났지. 만나서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지 척하면 삼천리였으니까. 좋다, 하자. 그래가지고 인자 나는 그날부로 이철이랑 전북으로 가가지고 이철 친구 지금 국회의원 돼 있지. 최규선인가 그 친구 만나고 전북대 출신, 요 전북출신인데 그래가지고 전북대 법대생들을 세 명인가 소개를 받았어. 내가 인제 전북대, 전남대, 조선대 하여튼 인자 호남지역을 맡기로 하고, 그래서 인제 다음 어디서 만나기로, 그래가지고 다음부터 대전, 속리산, 조치원, 구포 등등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만났는데, 천안 등등. 어쨌든 rfo가지고 인제 전북대생들을 그 뒤로 약속해갖고 만나고 그쪽 한 7,8명 된 사람들하고 만나고 보냈는데 이게 일정한 거리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애매한 거여 이제. 내가 술을 못하는데, 선천적으로 못해요. 내가 알콜 분해요소가 안나오니까. 근데 이제 그런 이야기 할라믄 호탕하니 호탕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요강만 하다고 했는디 이렇게 큰 맥주잔을 두세 개 마셨는디 아조 우아래로 동시에 앉아서 동시에 뿜어내는데 아 죽어 브렀어. 맥주잔 세 개 먹고, 내가 일년이면 맥주 한잔도 못 마시는데, 한 컵도.



면담자: 집안이 그러신가요?



구술자: 그래, 유전이야. 우리 아버님이 술 한잔도 못하셨어. 하여튼 이만큼도 못해. 감주, 보리 쉰밥으로 만든 감주 먹고도 마루에서 떨어져 브렀다고. 내가 초등학교 때. 마당으로 떨어지고 그랬는데, 산딸기 먹고 산에서 취해서 잠들어 블고. 그 정도로 내가 술에 약한데 맥주 이만한 놈을 마셔가면서 막 떠들고 어쩌고 했지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 1차 2-3).



김정래도 경락연구회라는 위장회사 명칭을 사용하던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 배후였다는 것이 사실임을 이렇게 기록한다: “경락연구회는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추동하기 위하여 학생운동과 연계를 맺는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은 대구지도부에서 서울지도부로 파견되어 이수병, 김용원의 지도를 받아 민청학련 봉기계획에 착수하고 조직활동을 벌여 나갔다” (김정래 2011, 175).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윤상원과 더불어 광주운동권 핵심이었던 윤한봉과 김상윤을 1973년 11~12월에 인혁당 재건위가 포섭하였으며, 인혁당 재건위의 여정남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이철이 있었다. 『正史5・18』은 민청학련 조직책 이철이 훗날의 남민전 전사 김정길과 더불어 윤한봉과 김상윤을 포섭하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한다:



……73년 11월께 광주에 온 이철에게 드러나지 않은 윤한봉을 전남지역 총책으로 천거한 김정길의 말이다. 김은 한 달 뒤 당시 동신다방(현 충장로 4가)에서 윤에게 “전남책을 맡아달라”고 어렵게 말한다……윤은……역시 드러나지 않은 김상윤에게 위를 통해 접근, 문리대 등을 중심으로 한 조직을 권유한다……한봉이 형이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그러면 해봅니다” 하고 학비를 벌던 학원강의까지 때려치우고 조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김은 문리대를 비롯 의대,, 조선대 의대까지 넘나들며 분주해진다 (광주매일『正史5・18』 1995, 36).



1980년의 광주사태 때처럼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때도 광주운동권이 전국적 규모의 봉기를 조직하는 주동자들이었으며, 광주가 그 본거지였다는 사실을『正史5・18』은 이렇게 기록한다:



조직이 무르익어 가던 12월 말 이철, 나병식, 황인성이 또 광주로 내려와 당시 조직된 사람들과 재접촉이 이뤄진다. 이어 다음 해 1월, 전국상황을 함께 점검하는 자리가 속리산에서 시도된다. 이미 조직이 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감지한 민청학련 전국 조직책들은 조치원에서 만나 통행금지가 없었던 속리산으로 유람객을 가장해 자리를 마련했다.



전남대에서 윤한봉・김상윤이, 서울대에서 황인성(독문 4) ・전홍표(철학 4), 경북대에서 임규영 등이 모였다. “전국에서 동시에 일시에 궐기하기 위해 3월에 마지막 점검을 하자”고 약속한대로 3월에 부산 구포구에서 만난 전국 조직책들은 시내에서 역사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서울의 황인성, 경북대 이강철・황철식, 전남대 김상윤 등은 이 자리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선언문을 작성, 장기표가 작성한 <민중의 소리>를 함께 소지하고 귀향한다 (광주매일『正史5・18』 1995, 37).



아마 본인들은 인혁당이 주는 돈은 북한이 주는 자금인 줄 몰라겠지만 이철과 황인성이 광주일고 출신 운동권을 포섭하기 위해 광주로 여러차례 내려왔다는 사실이 여기서 다시금 분명히 확인된다. 그런데 이철과 황인성이 나병식과 같이 왔다. 나병식이 누구던가? 나병식 역시 광주일고 동문이었다. 이처럼, 인혁당 재건위와 광주일고 광랑 동아리로서의 광주운동권의 연결고리는 인혁당측의 여정남과 민청학련측의 이철의 연결고리, 그리고 광주일고 동문 나병식 등을 접선 매개로 한 이철과 전남대 광주일고 출신 운동권의 연결고리였다.



이렇게 민청학련 조직망을 키워주는 방법으로 학생 운동권을 표면에 세운 인혁당 재건위는 서울 쪽은 보안유지가 매우 어려워 거사 시기가 4월 초순을 넘기지 않기를 바랬다. “조직이름도 정식조직이 아니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선언문도 미리 사용치 말고 데모 전날 일제히 뿌리기로 한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7).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고 지도부가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기 시작, 공동연합시위는 무산된다. 4월 3일 서울 주요 대학에서 소규모시위가 터져나오고 민청학련 이름으로 된 <민중・민족・민주선언>과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이 배포된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37).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자 윤한봉과 박형선과 김상윤 등 광주일고 동문들이 오히려 일을 더 크게 터뜨렸음을 『正史5・18』은 이렇게 기록한다:



4월 8일까지의 자수기간 중 잡히지 않으면 9일 데모 후 잡혀가자고 결의한 전남 쪽은 8일 저녁 당시 불로동 2층 술집 블론디에서 모인다. 김상윤은 김정순(당시 국문과 여학생)과 애인으로 가장해 자신의 학동자취방 벽장에 숨겨 놓았던 유인물(윤한봉이 작성한것. 민청유인물은 사건이 발표돼버려 사용 안 함)을 가져와 배부한다.



9일. 윤한봉・김상윤・박형선・최철(농1)은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당시 스쿨버스 정류장이 있던 계림동으로 가서 차 안에서부터 유인물을 뿌리면서 살포하다 대기중인 경찰에 연행된다 (광주매일 『正史5・18』1995, 37).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 명이 구속되었을 때 간첩단이 가족들에게 1인당 5만원씩 위로금을 전달해 주었을 만큼 김용규는 이 사건의 북한측 관련자였다 (김용규 1999, 299).



2. 광주일고 동문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



윤한봉도 5・18 진영 기자들도 광주사태를 윤한봉의 1970년 후반의 운동의 산물로서 이해한다. 그러면 윤한봉이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에 대하여서는 광주운동권이 오랫동안 함구해온 비밀이었다. 그가 1978년부터 어떤 단체들을 조직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증언과 보도가 있었으나, 그가 1976~77년에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하여는 2006년 이전까지는 엄격한 비밀이었다. 그와 그의 조직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 그런데 7~8 명의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광주운동권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의 간접적 산물이 광주사태였다.



1980년 5월 17일 밤 박형선이 예비검속되었다. 왜 그가 예비검속되었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규모 봉기를 국가가 막기위하여 사전에 손을 써야 할 때가 바로 5월 17일이었다. 그러면 누가 예비검속의 대상이었던가? 과거에 연행된 적이 있었던 운동권이 예비검속 대상이었다. 그리고 박형선이 과거에 두 번 연행된 경력이 있었던 운동권이었다. 1978년에는 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그를 연행하였는가? 대통령 암살음모 진행 과정에서 생긴 한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음모의 꼬리가 길면 때로 꼬리가 잡히고 그림자가 드러나는 법이다. 윤한봉의 조직의 대통령 암살 음모 자체는 한번도 수사당국에 적발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가 노출되어 빅형선 등 그 조직원들이 정보부로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박형선과 정상용 등이 임기웅변으로 수사관들을 속이고 무사히 빠져 나왔지만 그 기록은 정보부에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예비검속 대상이었던 것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정상용과 이양현이 함평으로 도망가 숨어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정상용은 자칫 다시 연행되는 날에는 과거의 비밀에 취약했다. 그리고 대통령 암살 음모 동지였던 박형선이 이미 연행되어 있었을 때는 그 가능성이 더욱 컸기에 정상용은 이번에는 몸조심하고 싶었었다.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은 5・18기념재단의 역사기록을 남겨두기 위해서도 중요하므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 즉 정상용과 박형선과 조계선과 자신 광주일고 광랑 출신 동아리로서의 광주운동권이 1976~77년에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구술자: 이게 어제부터 지금까지 광주 운동사에서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사석에서는 몇 군데서 이제 이런 일이 있었다 말하고 넘어갔는데, 공식적으로는 이제 언급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어요. 이 사건을 말을 할까 말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차피 내 건강도 그렇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또 이제 공소시효가 지났어요, 이게. 인제 말해도 돼. 에. 76년 7년 사건이니까 음...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거든. 그래봤자 2002년 정도 되면 다 끝난거야. 근게 공소시효가 한참 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래도 할까 말까 하다가 518기념 재단이 임의단체도 아니고 두고두고 이런 활동을 할텐데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관련자들의 동의는 내가 안구하고 에. 심정적으로 충분히 동의를 할 몇 사람 이름을 거론하는 것으로 하고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먼 일이 있었냐면은 어제 내가 이야기할 때, 4월 9일 75년 4월 9일. 인자 전남대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혁당 관련자 8명 사형당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악을 썼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어떻게 마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던지 아, 요 정권에게 유인물이나 뿌리고 시위 집회나 하는 식으로 하고 도저히 엄두가 안나. 참아낼 수도 이겨낼 수도 없고 오래걸릴 것 같고. 그래서 봐불라면 적장을 보라고 박정희를 암살을 해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웠죠. 추진을 했죠. 한 명 두 명 이제 끄집어들였죠. 우리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 무지막지한 학살 정권, 독재정권을 꺼꾸러들일 수 있겠느냐. 적장을 봐블자. 그래가지고 인제 한 일곱 명, 일곱 명 정도 끌여 들였죠. 나까지 해서. 근데 그 중에 나를 포함해 네 명은 이름을 인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인제 5월 항쟁 당시 지도부에 외무부장을 맡았던 그 사람인데, 정상용 국회의원도 했었죠. 71년 교련반대 시위 때 강제 입영되었던 친구죠. 학교도 그냥 자퇴를 해버렸어요, 이 친구가. 교수들한테 교수님의 기름기 낀 얼굴과 튀어나온 배를 보고 강의를 계속 듣는다는 것이 곤혹스러워서 그만둡니다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자퇴를 해분 친구들이 둘이나 있어요. 강제 입영당했던 친구 중에. 그 친구 중 하나가 정상용, 하나가 이양현 그런데. 인제 어쨌든 간에 정상윤하고 내 매제인 박형선이하고 그 다음에 이제 농민운동하다가 나중에 남민전으로 들어가서 혼나고 나온 조개석[조계선]이라고 있어. 거리해서 나까지 네 명, 나머지 세 사람이 있는데 인제 추진했는데. 세 사람은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공직에 있기도 해서. 그때 내가 이야기를 하기를 우리가 무슨 특수 훈련을 받아가지고 저격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 찾기도 어렵고 그런 성능 좋은 총도 구입하기 어렵고, 영화에서 나오는, 그러니까 그런 정밀한 방법으로의 암설은 포기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해서 폭탄으로 봐버리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수류탄하고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폭 형식으로 안고 뛰어드는 그 방법밖에 없다. 확실하니 봐불라면 그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에 동의해 갖고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을, 인제 물었어요. 어디서 이걸 구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저렇게 구할 방법이 군대 밖에 없어요. 수류탄. 그래서 군에 입대해 있는 좀 말이 통하는 선후배 친구들을 찾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이제 찾아서 수류탄을 세 개 확보하고 인자 다이너마이트를 두 박스 뇌관까지 해서 확보하고. 준비를 해놨는데 근데 그때 양이 덜 차. 더 많이 준비해서 하나가 실패하면 또 봐불고. 이런 식으로 할라고. 이제 그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가, 그러면서 내색 전혀 안했지. 그 쪽에서 갑자기 내가 활동을 안하고 딴짓거리 하는 것처럼 보이면은 저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해가지고 집중적으로 또 사찰을 다닌다 그래가지고 계속적으로 평상시에 하던 대로 움직이면서 그 작업을 조용히 추진하다가 인자 (교도소에)들어가버린 거예요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2-4).



윤한봉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였을까? 위의 증언에서 윤한봉은 그 이유를 8명의 동지들을 복수심의 발로로서 표현한다. 광주일고 광랑 동아리로서의 광주운동권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동지로 여겼다는 사실, 복수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집념을 불태우고 철저한 실행 준비를 하였을 만큼 동지로 여겼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독자들은 뜻밖의 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첫째로 양자 모두 통혁댱 잔당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유신잔당’이란 용어를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그들은 최규하 대통령도 신현확 총리도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모두 유신잔당이라고 불렀다. 전두환이 유신잔당이었다는 주장은 그들의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와 앞뒤가 전혀 안맞으니깐 십 년 후 부터는 말을 바꾸어 전두환을 ‘신군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은 전두환은 유신잔당도 신군부도 아니었다. 만약 전두환이 유신잔당이었다면 그가 신군부였다는 5.18측의 현재의 주장이 거짓말이 되며, 만약 전두환이 신군부였다면 그가 유신잔당이었다는 광주사태 당시의 그들의 주장이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도 광주운동권도 그 원 줄기가 통혁당과 한 통속이었으므로 통혁당 잔당이라 부를 만하다.



둘째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여정남이 건네준 공작금으로 이철과 광주운동권이 술잔을 주고 받으며 동지애를 키웠으니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동지로 여겼으며, 민청학련 주류가 광주운동권이었다. 윤한봉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위해 남달리 복수심을 붙태웠던 이유도 이런 끈끈한 유대 관계로 설명된다.



그런데, 윤한봉이 박형선과 정상용 등 광주일고 동문들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증언을 2006년 1월 24일 박현정 구술자에게 하기 10 여년 전인 1989년 11월에 정상용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제목의 증언록에서 그가 1970년대 후반에 광주일고 선후배들과 더불어 그런 불온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모험주의”라는 단어로 가볍게 시사한 바 있다:



결국 학내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내운동의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왔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때 내가 노래했던 '혁명'은 다분히 감성적인 면에 치우친 낭만적인 가치였다. 주위의 선후배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이 궁리 저 궁리 해보았으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을 실현하기엔 현실은 너무나 험란했다. 상황이 어려운 때인만큼 우리들의 생각도 그만큼 조급하고 모험주의적으로 흘러 결국은 학교를 뛰쳐나온 뒤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일은 거의 없었다 (정상용 198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부터 김재규와 광주운동권은 동맹 관계가 된다. 그러나, 그 전에 2년간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와 광주운동권 사이에 숨바꼭질 게임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2011년 이명박 정부 중앙수사부 수사대상이 된 박형선이 1978년 잠시나마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수사 대상 명단에 오르게 되었던 에피소드를 그의 처남 윤한봉은 2006년의 구술녹취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구술자: 인제 나는 나가서 그 작업을 해야 하니까 준비해놓은 것도 있고.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인제 우리 형하고 하튼 누가 면회를 왔어요. 근디 이제 직계가족이 아니면 면회를 안 시켜줬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형선이가 내 메가 왔는데 이 친구가 못 들어오고 창문 밖에서 이라고 손만 흔들고 갔어요. 면회를 했는데 인제 그때 그래요. 형선이가 책 가져와서 책 넣었다. 알렉세이『뿌리』 들어왔는데 아 인제 당연히 그날로 책이 들어와야 하는데 책을 안 넣어줘요. 독촉을 했지. 왜 안 넣어주나. 안 넣어주고 그날 넘어가. 그 다음날 또 안와. 막 문을 차고 왜 책을 안 넣어주냐고. 그런게 이제 책이 들어왔어. 그래서 이제 재미난 소설부터 먼저 읽는다고 해가지고 알렉시이 『뿌리』를 보는데 한참 읽다보니까는 볼펜으로 활자 사이에다가조. 딱 하나 쓰였어. 예감이 이상해서 살펴가면서 보니까는 조. 그 뒤에 글짜 써진거 보니까 직, 의, 명, 령, 이, 오, 빨리 나오시오. 그래놓고 뒤에다가 인자 자기들 별명을 늘어놓은 거에요. 이 원수들이. 하마, 참새, 이러니 뭐 이러고. 그러니까 그 때 교도소에서는 이 책을 돌려보거든. 보고나서 다른 사람 주고 그랬는데. 근데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런디 나는 또 생각없이 볼펜으로 째깐한 글씨니까 지위부써 이제. 그래갖고 이제. 그랬는데 그 다음날 운동을 갔다 왔는데 그 시간에 이놈들이 들어와가꼬 책을 글씨를 어떻게 했는가 본 거에요. 내가 안지웠으면 넘어가는 건데 지위노니까 문제가 된 거에요. 나중에 사건이 끝나고 보안과에서 가서 기록을 보니까 처음에 책에 대해서 대장에게 ‘불허’, 그래갖고 ‘낙서’. 근데 그 다음에 이걸 끗고, ‘허가’ 그래놓고는 가로 해놓고 ‘공작상’ 그라고 써 있드라고. 공작상 어떻게 된가 하고 넣어본 거에요. 거기에 내가 걸린 거죠. 아, 이거 뭐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에요. 우연히 그놈들한테 걸린 거지…… 그런데 그 시간에 인제 나중에 인자 확인해 본께 먼일이 있었냐면 딱 내가 이걸 지운 것이 드러나자 정보기관에서도 그러더만. 수평적으로 광주 정보부하고 협조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울 본부에다가 이야기를 해가지고 헬리콥터가 떠버린 거에요. 급히 광주로. 조직을 잡을라고. 와가지고 광주 정보부 한쪽 칸 비우라고 그래가지고, 정보도 안줘블고 여기다가는, 그러드마 그놈의 시키들. 그니까 자기들이 일종의 비상 수사관을 하는 거야……그니까 이제 그 친구들이 하마부터 참새 다 정보부로 간거여. 그래갖고 문 뚜드리고 요리 들어와갖고 나를 왜 찾소? 너 누구여 그런게 아 내가 당신들이 찾는 하마요. 왜 날 찾았소? 왜 날 찾어. 넌 누구여. 같이 간 것도 아니고 따로따로 들어가갖고. 내가 참새라는 사람이오. 어째 참새같이 안 생겼소? 누구같이 생겼소? 이 사람들이 기절해버리지……그래가지고 3일째 되는 날 이제 오후에 정보과장이 나와가지고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보고 쓰래.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것을 그들이 기대한 대로 야무지게 써준 게 도 이놈들이 놀랜 거야. 나는 내 나름대로 관점을 쓰는 것이니까. 아, 대단히 깊이 생각한 것 같다고. 아 머, 하도 빨갱이로 몰아싸코 하니까 내가 솔직하니 내 심경대로 쓴거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먼 밥을 시켜주고 그러믄서 대우가 달라져.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면 어떻게 하겠냐. 그래서 뭔가 감이 좀 잡혀서 아, 내가 더 늙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은 돌아가셨으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어쩌고 저쩌고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빨리 나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리끝이 쭈뻣쭈뻣 스니까 빨리 나가야지, 나가서 이 일을 수습해야지, 큰일나게 생겼다. 그렇게 해서 살겠다고. 법도 잘 지키고, 그래가지고 몇일후에 석방되어서 나갔어요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위의 인용문은 상당히 긴 녹취문을 발췌한 것인데,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이다. 박형선과 정상용으로 구성된 광주일고 동문 동아리는1978년 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결행하려 하였는데, 문제는 7명의 조직원 중에 한 명 윤한봉이 아직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그 조직은 윤한봉에게 각서 안 쓰겠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으며, 그 역할을 윤한봉의 매제 박형선에게 맡겼다. 박형선이 책을 하나 넣어 주면서 거기에 “조직의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라고 써놓고 자신의 별명 하마 등 조직원들의 별명으로 서명하였다. 윤한봉이 책을 읽은 후 “하마” “참새” 등의 글자들을 지우는 것을 눈여겨 본 교도소 보안과에서는 간첩단 암호가 아닌지 의심스러워 수사당국에 보고하였고, 서울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헬기를 타고 광주로 와 직접 수사하였다. 그때는 박형선과 정상용 등은 하마와 참새 등은 암호가 아니라 별명이라고 해명하고, 자기네 조직은 구속자회라고 둘러대어 모두 무사히 금방 풀려났다.위의 인용문은 상당히 긴 녹취문을 발췌한 것인데,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이다. 박형선과 정상용으로 구성된 광주일고 동문 동아리는1978년 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결행하려 하였는데, 문제는 7명의 조직원 중에 한 명 윤한봉이 아직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그 조직은 윤한봉에게 각서 안 쓰겠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으며, 그 역할을 윤한봉의 매제 박형선에게 맡겼다. 박형선이 책을 하나 넣어 주면서 거기에 “조직의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라고 써놓고 자신의 별명 하마 등 조직원들의 별명으로 서명하였다. 윤한봉이 책을 읽은 후 “하마” “참새” 등의 글자들을 지우는 것을 눈여겨 본 교도소 보안과에서는 간첩단 암호가 아닌지 의심스러워 수사당국에 보고하였고, 서울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헬기를 타고 광주로 와 직접 수사하였다. 그때는 박형선과 정상용 등은 하마와 참새 등은 암호가 아니라 별명이라고 해명하고, 자기네 조직은 구속자회라고 둘러대어 모두 무사히 금방 풀려났다.



당시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윤한봉과 박형선의 동지들은 대통령 암살 음모 조직원인 동시에 구속자회 회원들이었다. 그들이 구속자회 회원 동지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간첩단 혐의는 쉽게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광주운동권 형성 과정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있다. 민청학련 사건의 북한측 당사자였던 김용규는 당시 구속자회는 1974년에 간첩단이 북한자금으로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남한 운동권 양성의 포석으로 간첩단이 학생운동권을 시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들 가족을 방문하여 금품을 전해주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용규 1999, 284-289). 김용규는 형권이란 가명의 남파 공작원이 여성 보호막으로서 송 마담과 평양에서 간첩 훈련을 받고 돌아온 서울 법대생 박군을 시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가족들에게 금품을 전하였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가도 좋겠지만 당신이 가는 것이 더 좋을 거야. 가서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위로만 해주고 와. 알았지?" 이렇게 형권(가명)은 송마담으로 하여금 박군을 앞세우고 최군과 이군의 가족들을 방문하고 위로금으로 각각 5만원씩 전하도록 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현상수배된 이철, 유인태에게 걸린 현상금 20만원에 비하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모한 투자가 아니었다 (김용규 1999, 289).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75년에 윤한봉이 박형선, 이강 등 광주일고 동문들과 더불어 그 구속자회를 이어받아 구속자협의회란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그만큼 간첩단은 구속자회 성원이었던 광주일고 동문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윤한봉 편에서 정보부는 원수였다. 윤한봉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었던 이유도 실은 정보부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 수사는 정보부가 했던 것이지 대통령이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보부에 대한 그의 원한의 화살 표적이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보부 편에서는 윤한봉이 전혀 원한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정보부 정보과장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출소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만 물어보고 그 답변을 근거로 사건 종결은 물론 교도소 석방 절차까지 도와주었다.



그런데, 석방되기 전에, 즉 간첩암호 의혹 소동이 막 벌어졌을 때 윤한봉이 도둑이 제발 저려 자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음을 그는 이어 이야기한다. 첫날 수사를 받고 돌아와서야 그는 박형선 등 그의 동지들이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의 목표가 달성되려는 순간이 왔다. 그러나 윤한봉에게는 그때가 또한 가장 겁에 질리는 순간이었다. 줄줄이 엄청난 일들을 저지르는 그에게도 겁은 있었으며, 자살 충동을 느꼈을 만큼 겁이 많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첫날, 첫날 가서 수사를 받고 들어와 가지곤 밤에 잠이 안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이구야 큰일났다. 지금 틀림없이 밖에서 난리가 났을건데. 이거 보통사건이 아니다. 자칫하면 천지가 쑥밭이 되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 에라. 너무 절박해분거죠. 너무 심각해분거에요. 사건 자체가. 그래서 자살기도를 했는데. 그대 뻔히 혼자 독방에서 방법이 있나. 화장실을, 기둥 모서리가 이렇게 각이 진 기둥인데. 정확하니 여기(이마정수리)를 중앙으로 해서 들어 받아블면 머리가 쪼개져서 죽을 것 같다고 판단이 돼서 고놈을 잡고는 그냥 그대로 받었는데 그래갖고 정신을 잃어븟지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윤한봉이 5・18기념재단 역사는 1976~77년 광주운동권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일곱 명의 암살 음모 조직원들 중 다섯 명이나 광주사태 주동자들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윤한봉은 그 조직원들이 연행되어 김재규의 정보부 수사를 받고 풀려난 이후 당분간 조심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등 모든 암살 음모 증거물들을 없애 버렸으나, 그 중 자신을 제외하고도 빅형선과 정상용과 이양현 등이 광주사태 주동자들로 알려지게 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놓고는 조심을 당분간 해야한다 그래가지고 증거는 없어졌지만, 증거물, 아이고 정말 조심하면서 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저놈들이 내가 나가면 법을 지키고 어찌고 한께는 혹시나 해가지고 전향은 아니지만 내 각서같은 것을 아 이자식이 진짜로 그러나 하고 보는디 뻔하죠 뭐. 나오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고 사건이 이제 5․18이후에 어떻게 되냐면은 항쟁지도부에가 그 사건에 관련된 살마이 세사람 있었어요. 항쟁지도부에가. 근게 또 이놈들이 예비검속된 사람중에 형선이도 들어있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오, 요 새끼들 봐라. 또 이렇게 된 거에요. 이제. 응 이상하게 생각한거지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광주사태에는 몇 가지 역설적인 사실들이 있다. 광주일고 동문들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이었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그들은 모두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도망갔다. 대표적 시민군으로 인정받았기에 1988년 광주단체들의 지원으로 국회의원 신분이 되었던 정상용도 실은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처음 닷새 동안은 몸을 숨기며 도망다녔던 자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1일은 시민들 손에도 총기가 들어와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전면전으로 접어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한 끝에 인원과 화력이 부족하여 계엄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시민들의 무장을 지켜보면서도 시민들이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시를 장악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중에라도 피해는 모두 운동권이 입게 될 것이라는 철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각자 몸조심하기로 하고 헤어져 오후 4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은 군인가족들이 모여 사는 상무대 부근이어서 안전지대로 생각했는지 노동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집에 피신와 있었다. 이들의 의견도 지금 우리의 힘은 약하니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상황을 관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낮에 군인가족들이 학생들을 비난하여 사소한 시비가 있었다면서 무조건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차에 타고 가면서도 얘기를 계속했다. 현장을 떠난다는 것이 양심에 걸렸지만 두려움 때문에 나는 결국 광주를 등지고 피신을 했다. 그날 밤 광주를 벗어나 광산군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계속해서 논의를 벌였으나 죽더라도 다시 돌아가자, 잠시 더 관망하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자, 자칫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하니 일단 이 상황은 피하자는 3가지 의견으로 분분했다. 다음날(22일) 아침 일찍 친구 이양현의 집이 있는 함평으로 피신했다 (정상용 1989).



정상용은 이 증언을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하였다. 그가 1988년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에서 평민당 후보를 추천하였을 때 광주운동권 출신으로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에 따라 대표성을 가질 만한 인사”를 후보자 선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정상용은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윤한봉 1996, 58), 5월 25일 윤상원이 비로서 학생수습위를 몰아내고 도청을 장악한 후,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외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의 자격으로 윤상원이 임시혁명정부로서의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그 명칭을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산하조직 ‘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서 그대로 따왔다. 도청 점거 목적은 임시혁명정부 수립이요, ‘투쟁위원회’는 임시혁명정부, 즉 시민군(무장혁명군) 점령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한 기구로서 조직되었다.



그래서 이정로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민중의 임시적 권력기관” “임시혁명권력” 등으로 부른다 (이정로 1989, 31). 이정로는 또 이렇게 역설한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유일한 '봉기의 지도기관'이자, 광주 지역의 '임시혁명권력'이었다. 민중 무장의 모든 역량은 이 기관에 총집결되었으며, 그들은 내무, 외무, 치안, 군대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을 혁명권력으로 보지 않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35). 이어 이정로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혁명권력을 탄생시킨 것은 공산혁명의 한 수순이었음을 러시아 공산혁명사 실례를 들어 이렇게 밝힌다: “러시아에서는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자발적 투쟁의 성과로서 [소비에트]라는 혁명적 권력을 탄생시켰다. 남한에서 진행된 1980년 5월의 광주무장봉기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는 또 다른 임시혁명권력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 35).



최정운도 시민군이 “국가의 의례를 집행하기 시작하고, 시민들을 징병하고, 재산을 집행하는 등 국가권력을 행사했으며, 스스로 무장력을 갖춰 시민군을 조직하는데 이르러 국가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최정운 1999, 146-154). 또한 그는 ‘전남민국’, ‘광주공화국’이란 명칭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었음을 긍정한다 (최정운 2001, 326). 그 당시에는 국가 전복 기도가 중요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사실을 감추는 것이 중요한 5.18측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란 그 당시의 공식 명칭 대신 ‘항쟁지도부’란 신조어 별명으로 광주사태를 기록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항쟁 대상도, 항쟁 이유도, 항쟁 개념도 없었으며,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이정로가 말하듯이 임시혁명권력이었다.



이정로는 광주일고 동문들이 요직을 독점한 이 임시혁명권력에는 자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음을 이런 말로 높이 평가한다: “자본가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무장봉기에 의하여 수립된 권력에는 자본가는 철저히 무력화되고 단 한사람도 참가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진정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정로 1989, 36). 광주사태가 일어난 지 9년째 되는 해에는 이정로가 이렇게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 31주년에 광주일고 동문들의 대형 금융비리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였는가? 부산저축은행의 최대주주도 광주일고 동문이라고 한다. 이 비리 사건에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선의의 자본가가 아니었다. 1980년에는 노동자 계급을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자들이 권력과 부를 거머쥐기 시작하면서 서민과 노동자들의 생계가 더욱 어려워지게 하는 비리를 저질러 왔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민우(윤상원)와 신애(전옥주)가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그 모티브는 박형선의 여동생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남녀 위장취업 1호였던 이 한쌍의 전남대 출신 운동권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이른바 '운동권 애국가'로 자리매김할 만큼 윤상원이 좌파 진영에서 영웅시되는 이유는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다른 광주운동권은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정상용은 자신이 처음 며칠은 도망다녔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시민들의 무장을 지켜보면서도 시민들이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시를 장악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해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중에라도 피해는 모두 운동권이 입게 될 것이라는 철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상용 1989).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과거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꾸몄던 사실이 언제 탄로날지 모른다는 '아킬레스 건'이었다. 서툴게 암호를 사용하다가 1978년 김재규의 정보부로 연행되었을 때는 임기웅변의 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5월 17일 야간에 박형선이 예비검속된 이 마당에서는 언제 그의 입에서 조직 비밀이 발설될지 몰랐던 것이다. 동지들이 이렇게 노심 초사하며 도망다니는 와중 박형선이 이번에도 꾀병으로 미꾸라지처럼 수사를 피한 사실을 윤한봉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니까 또 형선이가 또 꾀를 내가지고 요가를 많이 했는데 이불을 둘러쓰고 요가를 해가지고 심호흡을 해가지고 온 몸에 땀이 줄줄줄 새부러요. 그렇게 되니까, 짠거지, 그래가지고 헌병을 물고 해싼게 땀이 막 비오듯이 쏟아지고 이러니까 이불 들러쓰고 그 무더운 여름에 그러니까 병원으로 와서 우리 전남대 병원으로 와가꼬는, 전남대 병원 오면 맨 광주일고 선후배들이 의사들이나 이놈들이 어마어마한 위기의 상황인 것처럼. 이 보안사놈들이 와서 보면 아조 큰 병인 줄 알아고, 좀더 지켜봐야 합니다 어쩌고 해가지고 그 위기를 넘겨버리고 그런 적도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때 당시에 수배죠. 만약 잡히면 그 사건까지 한꺼번에 나올 거 같아서 더 마음 졸이고 그러고 있었는데. 야튼 광주에서 그런 비사가 있어요. 하기야 그게 그런 사건으로 끝나서 다행이죠. 진짜로 그 일을 추진했다가 던졌는데 박정희는 안죽고 그래블면 난리 나부러. 생사람 수없이 죽을 판인데. 에 어쨌든간에 그렇게 해서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2차 1-5).



박형선의 처남 윤한봉의 이 증언에서 금년 2001년의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에서 드러나긴 시작한 박형선과 그의 광주일고 동문들의 사기 행각은 그 뿌리가 광주사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감을 본다. 도주한 윤한봉에 이어 광주사태 발생 원인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었던 박형선이 꾀병을 부려 전남대로 후송되자 광주일고 동문들이었던 전남대 의사들이 중병인 것처럼 허위진단해 주어 병원에 장기 입원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그 당시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에서 광주운동권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수사 당국이 소상하게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역사학도 (在美) 광주사태 연구가: hslee3601@gmail.com/ 올인코리아: http://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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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부산저축은행=광주일고人脈



광주민주투사→부산저축은행 날강도로!





















기사입력: 2011/06/06 [09:54] 최종편집: ⓒ 올인코리아









6.25 이래 북한의 도발 사례

작성일 : 11-01-14 15:04 6.25 이래 북한의 도발 사례


글쓴이 : 지만원 조회 : 1,420 추천 : 89



http://blog.daum.net/hown38/8124341





☞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2011년의 지금으로부터 61년 전, 1950년 6월25일, 스탈린-모택동-김성주(자칭 김일성)의 계획적인 기습남침에 의해 3년간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모택동과 한반도 전쟁을 개략적으로 합의한 후 김일성에게 중국 동의 조건부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했고, 한국전 개전 후에는 중국을 한국전에 끌어들이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했다



“6.25전쟁은 스탈린이 계획·감독하고 김일성과 모택동이 주연과 조연 역할을 한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1949년 10월 중국의 공산혁명 등 변화된 국제정세에서 김일성의 남침의지를 이용해 참전이 예상되는 미국과 중국의 국력 약화를 기도하고, 중국의 대서방관계 개선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모택동은 통일을 달성한 중국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참전했다”



6·25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남침 흉계와 스탈린의 중국을 적극 이용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발생한 전쟁이라고 말했다.<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1) “아 !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학살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수 84,532명



▲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

(‘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그 대상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당했다.



전라남도' 지역 피살자만 43,511명 (전체의 72.6%)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15,956명 가운데 1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인민군, 평양 칠골리에서만 2,500여명 학살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사람들을 줄로 묶어 총살한,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처: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 사건의 전모', 박계주 著)



▲ 6.25 전쟁 당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들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위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인민군의 학살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사진출처: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처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당한 민간인이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이고, 납북자 수는 84,532명,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다.

<자료1. 김일성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戰時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 출처: 공보처 통계국 '6.25 사변 민간 피해 조사표'. 단위 : 명

지역 사망 학살 납치

서울 29,688 8,800 20,738

경기 62,621 7,511 16,057

충북 24,320 3,409 6,312

충남 23,707 5,562 10,022

전북 40,462 14,216 7,210

전남 14,193 69,787 4,171

경북 35,485 6,609 7,534

경남 19,963 6,099 1,841

강원 17,122 6,825 10,528

(교전이 직접 벌어지지 아니한 제주는 제외) / <자료 3.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 6.25 피해 현황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 년 7월 27일까지 한국전쟁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국가 전사자수 부상

한국 --- 227,800 명 --- 717.100 명

미국 --- 33,747 명 --- 92,134 명

영국 --- 710 명 --- 2,278 명

터키 --- 717 명 --- 2,246 명

오스트레일리아 - 291 명 --- 1,240 명

캐나다 --- 309 명 --- 1,055 명

프랑스 --- 2888 명 --- 818 명

태국 --- 114 명 --- 793 명

네덜란드 --- 111 명 --- 589 명

콜롬비아 --- 140 명 --- 452 명

에티오피아 --- 120 명 --- 536 명

필리핀 --- 92 명 --- 299 명

벨기에 --- 97 명 --- 355 명

뉴질랜드 --- 34 명 --- 80 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 20 명 --- 16 명

룩셈부르크 --- 7 명 --- 21 명

( http://www.geocities.com 에서 )



< 공산군의 병력 손실 >

전투손실 --- 인민군 --- 520,000 명

중공군 --- 900,000 명

비전투손실 (非戰鬪損失) --- 406,000 명

< 일반주민 피해 >

남한 -- 사망자수 --- 230,000 명 (인민재판, 폭격, 등)

실종자수 --- 290,000 명 (拉北 등)

학살자수 --- 120,000 명 ( 인민재판)

북한 -- 사망, 실종, 등 총계 -- 2,000,000 명

(육군사관학교 교재 한국전쟁사 555 쪽,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에서)

****************************************************************************

Name 지만원



양측의 병력수가 최대였던 1953년 휴전직전의 병력



◈ 국군

- 지상군병력:576,441명

육군:3개군단 18개사단, 해병 1개연대전투단(증강편제) 병력-576,441명

- 해군:1개 함대 병력-15,000명

- 공군:1개 전투비행단, 1개 훈련비행단 병력-11,461명

- 병력총계: 602,902명



◈ 북한군

- 육군:6개군단 18개사단, 7개 보병여단, 7개 전차연대 : 약 45만명

- 해군:4,442명

- 공군:6개사단 19,350명

- 병력총계:473,792명



◈ 유엔군(지상군만)

3개군단, 8개 보병사단, 1개 해병사단:341,628명



◈ 중공군(지상군만)

19개군, 58개 보병사단:약 135만명

내용출처 : 국방군사연구소 1997년발간



☞ 아래는 주로 UN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인민군 주력부대가 퇴각하며 발생한 학살이다.



1. 함남 원산(元山)학살

- 발생장소 : 원산시 시내, 신풍리 여왕산, 원산 앞바다, 원산인민교화소

- 방식 : 4명 1개조로 묶어 방공호에 집어넣고 집단총격으로 사살

- 희생자 수 : 1,700여명



2. 함남 함흥학살

- 발생장소 : 함흥인민교화소, 충령탑 지하실, 정치보위부 지하실, 함흥북쪽 덕산니켈광산 반용산 방공호

- 방식 : 집단 무차별 총살, 방공호의 경우 폭사, 우물 생매장, 투석

- 희생자 수 : 12,000여명 (납치자, 실종자 포함되지 않은 수임)



3. 강원 고성(高城) 학살

- 발생장소 : 교외 저수지

- 방식 : 저수지로 몰아넣은 후 폭사

- 희생자 수 : 800명



4. 함남 영흥(永興) 학살

- 발생장소 : 영흥국민학교 운동장, 영흥 방공호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1,520명



5. 함남 순천(順川) 학살

- 발생장소 : 순천 북서쪽 터널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200명



6. 함남 신고산(新高山) 천주교도 학살

- 발생장소 : 인근 과수원(사과밭)

- 방식 : 장작 몽둥이로 집단 가격 후 살아남은 자는 총살

- 희생자 수 : 190명



7. 황해 해주(海州) 학살

- 발생장소 : 해주형무소 등

- 방식 : 독살, 해주지역 우물에 집단 생매장 후 돌로 무차별 가격, 소사(불 태워 죽임)

- 희생자 수 : 아이 업은 부녀자들 포함 1,200여명 (이 학살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UN에 보고됨)



8. 함북 갑산군(甲山郡) 학살

- 발생장소 : 양유리 줄버드나무 밑, 부흥리 굴, 지경리 느티나무 밑, 읍내 우물 다수

- 방식 : 총살, 우물에 집단 생매장

- 희생자 수 : 420명



9. 함남 고원군(高原郡)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800명



10. 황해 수안군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1,100명/ 김필재 (코나스 객원기자)



2) 북한, 휴전협정 이후 주요 도발 221회…무력도발 26회

北 도발로 납치·사망 4119명 '60년간 당하기만 했다



1)항공기 테러 등 1953년 정전 후 무력도발 470건, 가장 빈번한 공격은…

北, 종전 후 470회 도발해 납치·사망 4119명

북한, 6.25이래 60년 간 정전협정 40만 건 위반 :



북한의 대남 도발 일지

- 북한, 휴전협정 이후 주요 도발 221회…무력도발 26회

- 北 도발로 납치·사망 4119명 '60년간 당하기만 했다

- 항공기 테러 등 1953년 정전 후 무력도발 470건,

- 가장 빈번한 공격은… 北, 종전 후/ 470회 도발해 납치·사망 4119명



노태우, 김영삼 시절에는 소강 상태를 보이던 북한의 대규모 인명 살상 도발이 김대중의 땡볕 정책 실시 이후 서해에서 해전 형태로 더 큰 규모로 재개되었다. 햇볕 정책은 도발을 줄이기는 커녕 더 큰 도발을 불러 왔을 뿐만 아니라, 핵무장까지 시켜준 국가반역적 정책이었다.



문) 최원기 기자, 6.25 전쟁 이후 남한에 대한 북한의 도발 행위,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몇 건이나 됩니까?



답)네,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이 1953년 7월인데요.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57년간 요인 암살, 항공기 테러, 육상과 해상 도발, 대량살상무기 발사 등 무려 42만5천 여 차례나 정전협정을 위반했습니다.



문) 정전협정 위반이 40만 건을 넘는다니, 일일이 살펴볼 수도 없을 것 같은데, 90년대 이전에 발생한 주요 도발로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답) 세 가지 사건을 꼽을 수 있는데요. 우선 1968년에 발생한 1.21 사태입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 한 사건인데요, 당시 북한의 정찰국은 31명의 유격대원을 침투시켜 청와대를 공격하려다 1명이 생포되고 28명이 사살됐습니다.



문) 나머지 두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답) 1983년10월에 일어난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과 87년에 발생한 대한항공 (KAL) 여객기 폭파 사건입니다.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은 버마를 방문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사건입니다. 당시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3명은 버마의 독립투사인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려던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해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범석 외무장관 등 한국 정부 각료급 인사 대다수를 포함한 17명이 사망했습니다. 또 대항항공기 폭파 사건은 87년 10월에 북한의 공작원인 김현희가 대항항공 858기를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해 승객과 승무원 1백15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입니다.



문) 미군을 겨냥한 도발도 있지 않았나요?



답) 네, 1976년에 판문점에서는 북한 군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문) 1991년에는 국제적인 냉전이 끝나고 남북한 간에도 불가침과 협력을 다짐하는 기본합의문이 채택됐는데요. 그 후에는 좀 변화가 있었나요?



답)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육상을 통한 무장간첩과 테러 활동이 많았는데요. 90년대 들어서는 해상 도발,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한 도발이 주로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96년과 98년에는 북한의 잠수정이 동해안을 침투하다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문) 서해에서도 교전이 자주 일어났죠?



답)그렇습니다. 북한 인민군은 1999년 9월 일방적으로 서해 해상분계선을 선포했는데요. 그 후에 서해에서는 해상 교전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지난 1999년 6월 1차 연평해전이 발생한 이후 2002년 6월, 그리고 2009년11월 등 세 차례에 걸쳐 해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또 올해 3월에는 북한이 잠수정으로 한국의 천안함을 공격해 해군 장병 4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어보시죠.“천안함은 북한의 기습적인 어뢰 공격으로 침몰됐습니다. 또 북한이었습니다.”



문) 2000년대에 들어서 북한은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를 겨냥해 핵실험과 미사일 같은 대량살상무기 도발을 시도하지 않았나요?



답)그렇습니다. 북한은 지난 98년 8월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한 데 이어 2006년 7월에는 대포동 미사일과 노동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또 지난 해 4월에도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문) 핵실험도 실시했죠?

답) 네, 핵실험은 남북한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위반인데요. 북한은

지난 2006년 10월 첫 핵실험을 실시한 데 이어 지난 해 5월 2차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북한의 발표 내용을 들어보시죠.“주체98, 2009년 5월25일 또 한차례의 지하 핵실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문) 북한의 대남 도발로 인해 귀중한 인명이 많이 희생됐는데요, 북한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사과한 적이 있나요?



답)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76년 발생한 판문점 도끼 살해 사건 당시 김일성 주석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또 96년에 발생한 강릉 잠수함 사건 때도 유감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한의 날조극’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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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한의 주요 대남도발 (자료 : 이래 Page 참조)



북한의 연도별 대남도발 일지 / 68년 1월 ~2010년12월

87년 KAL기 폭파 누락

북한의 대남 도발 일지

唐浦艦 沈沒로 숨진 海軍將兵 39名

당포함 침몰사건 1967년 1월 19일

당포함 전몰장병 추모식



◆ 북한군주요도발일지

2010년 11월 23일 (화) 21:23:52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북한이 23일 서해 연평도 인근에 100여 발의 해안포를 발사해 이 중 수십 발이 주민들이 사는 연평도에 떨어졌다.그 동안 우리 수역인 서해상에서 영토 위로 포사격 도발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 다음은 1996년 이후 북한의 주요 도발 일지.



▶1996년 4월 4일=북한, 군사분계선(MDL) 및 비무장지대(DMZ) 임무포기 선언

▶1996년 4월 5~7일=JSA(공동경비구역) 무장병력 초과 투입(200~300명), 중화기 반입

▶1996년 9월 18일=북 잠수함 강릉 앞바다 좌초(26명 탑승)

▶1997년 10월 17일=북한 무장군인 12명 대성동 주민 2명 납치

▶1998년 2월 2일=JSA 북한군 1명 2회 MDL 월경

▶1998년 3월 12일=북한군 12명 MDL 40∼50m 월경(아군 경고사격 20여 발)

▶1998년 6월 11일=북한군 GP(경계초소)서 아군 GP 방향 자동소총 4발 발사

▶1998년 6월 22일=속초 동방 18.4㎞ 해상서 북한 유고급 잠수정 1척(사체 9구) 발견

▶1998년 7월 12일=동해시 해안서 무장간첩 사체 1구, 침투용 수중추진기 1대 발견

▶1998년 12월 18일=여수 앞바다 침투 북한 반잠수정 1척 격침

▶1999년 6월 15일=북 경비정 서해 북방한계선(NLL) 월선, 1차 연평해전 발생

▶2001년 9월 19∼20일=북한군 철원군 DMZ서 MDL 월경(아군 경고사격)

▶2001년 11월 27일=북한군 파주군 장파리 DMZ서 아군 초소에 기관총 2∼3발 발사

▶2002년 6월 29일=북 경비정 NLL 침범, 2차 연평해전 발생

▶2003년 2월 20일=북 미그-29기 1대 연평도 NLL 13㎞ 남하(아군 전투기 대응출격)

▶2003년 7월 17일=북한군, 연천 DMZ서 14.5㎜ 기관총 4발 발사(아군 경고사격)

▶2003년 10월 30일=북 경비정 NLL 월선(아군 경고사격)

▶2004년 7월 14일=북 경비정 NLL 월선(아군 함포사격)

▶2004년 10월 10일=북 잠수함 동해 침투 첩보(아군 폭뢰 투하)

▶2004년 10월 26일=연천군 GOP 철책선 2곳 절단

▶2004년 11월 1일=북 경비정 3척, 서해 소청도 동방 6.5마일 및 연평도 서방 25마일 해상 NLL

월선(아군 경고사격)

▶2009년 9월 4일=북 경비정 1척, 백령도 동북쪽 10㎞ NLL 월선

▶2009년 11월 10일=북 경비정 서해 NLL 침범해 남하하다 함포 50여 발 발사. 아군 대응 사격해

교전(대청해전) 발생

▶2010년 3월 26일=백령도 서남방 2.5㎞ 해상에 해군 1천200t급 초계함인 천안함 침몰.

승조원 104명 가운데 58명 구조, 46명 실종

▶2010년 8월 9일=북한군 백령도 북방 해상에 해안포 10여 발 발사

▶2010년 11월 23일=북한군 연평도에 해안포 공격





2)휴전협정후 북괴의 도발일지
◈ 오늘의 소식(뉴스)

북괴 도발 일지



1958. 2. 15 KNA 납북사건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KNA(창랑호)가 평택 상공에서

무장 북한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돼 평양순안 공항에 강제착륙했다.

우리국회는 북 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6.5참전 16개국에 보내는등

강력 항의하자 탑승자 26명 전원을 돌려보냈다.



1967, 1, 19 당포함 침몰사건.

동해 북쪽 해상에서 해군함대 제1전단 소속 당포함이 북한군의 해안포를

맞고 격침된 사건이다. 당포함은 당시 북방한계선 근방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을 보호해 남하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1968, 1. 21 청와대 습격 기도사건.

북한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124군부대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을

남파하였으나 대부분 섬멸(사살 2 명)되고, 김신조 1명은 생포 되었다.



1968, 1. 23 미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동해(공해)에서 납치,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사체 1구 송환, 선체는 억류



1968, 1. 25 미군부대 초소 피습사건.

미군부대 전방 초소근무자 5명이 무장공비 15명 가량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음.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1968, 6. 17 DMZ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천 북방 DMZ에서 잠복근무중 침투하는 무장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잔당 도주



1968, 6. 19 DMZ 무장공비 사살사건.

철원 북방 D M Z에 무장공비 2개조 7명이 침투한 것을 교전 끝에

모두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4명)



1968, 7. 10 전방사단 CP요원 피습사건.

전방사단 CP요원이 잠복 근무지로 가던중 무장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으나 공비는 도주. 피해(부상 2명)



1968, 7. 23 DMZ 투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 8명이 DMZ 투입을 위해 진입 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4명, 부상 3명)



1968, 7. 29 남해 허사도 무장공비 출현사건.

전남 목포시 허사도에 무장공비 2명이 출현, 민간인 1명 살해하고 도주.



1968, 7. 31 연천 백학 공비사살 사건.

아군 G P요원 4명이 관망대로 가던중 무장공비 8명과 조우,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1968, 8. 3 전방사단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무장공비와 조우 교전 끝에 2명 사살,

2명 부상 입혔음.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1968, 8. 4 DMZ GP병력 피습사건.

아군병력 6명이 GP로부터 종격실로 연한 고지로 진입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피해(부상 1명)





1968, 9. 4 DMZ GP병력 피습사건.

아군 G P병력 7명이 약 70m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식수운반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1968, 9. 4 DMZ 작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이 크레모아 설치작업을 위해 진입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1968, 9. 5 G P병력 피습 및 납치사건.

아군 G P병력이 잠복근무를 마치고, 철수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2명 납치)



1968, 9. 5 무장공비와 교전사건.

잠복근무중이던 병력이 공비 3명을 발견, 사격을 가하자 공비도

자동화기로 응사 하며, 수류탄 10발을 투척하고 도주. 피해 (전사 1명)



1968, 9. 19 GOP 순찰병력 피습 사건.

GOP 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공비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1968, 9. 21 GOP 잠복호 피습사건.

GOP 잠복 근무자가 공비의 기습공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1968, 10. 16 DMZ 투입시 피습사건.

아군병력이 DMZ로 투입하던 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1968,10.30 ~11.2 울진.삼척지구.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126명을 침투시 켰으나 109명 사살,

7명 생포하였음. 피해(전사 38명, 부상 64명, 민간인 피살 23명)



1968, 10. 31 전방사단 G P병력 피습 사건.

아군 GP 병력이 수색정찰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5명, 부상 4명)



1968, 11. 1 서산 무장간첩 사살사건.

충남 서산 성연면 오사리에 무장괴한 2명이 출현하였다는 신고로

작전을 전개 무장간첩 2명 사살. 피해(전사 1명)



1968, 11. 2 전방사단 G P 병력 피습사건.

아군 G P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1968, 11. 8 전방사단.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1968, 12. 9 이승복사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이석우씨 집에 무장공비 5명 침입,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이승복 형제 3명과 이씨 부인 주씨를 무참히 살해. 공비들에게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나 칼로 찔린 장남 승복군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1969, 3. 15 미군부대 병력 피격사건.

미군 병력이 GP 앞의 군사분계선 작업을 위해 진입중 공비의 총격을 받았음.

피해(부상 3명) ※ 이틀후 후송하던 헬기추락으로 7명 사망



1969, 3. 16 주문진 공비 침투사건.

무장공비 8명이 주문진에 침투, 보안부대원을 사칭, 여인숙 투숙객 검문하고,

수상 파출소에서 경찰관을 납치하려다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1969, 5. 14 전방사단 공비 사살 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경계근무중 침투공비 1명 발견하고 사살



1969, 5. 15 미군부대 병력 피습사건.

미군 병력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사격을 받고, 응사하자 도주하였음.피해(부상 2명)



1969, 5. 20 미군부대공비 사살사건.

미군 잠복근무자(카츄사)가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일제히 사격을

가하자 응사하며 도주. 수색결과 공비 시체 1구와 기관단총 등 다수의 유기물 노획.



1969, 5. 20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 수색중대 잠복조가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집중사격으로 2명을

사살하고 기관 단총 등 다수의 장비 노획. 피해(부상 2명)



1969, 5. 23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야간 경계근무자가 3초소 전방에서 공비를 발견하고, 사격으로 1명 사살. 피해(전사 1명)



1969, 5. 25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순찰중 공비로부터 사격을 받고, 즉시 응사하여 공비 3명 사살. 피해(부상 1명)



1969, 6. 14 부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북 부안 하서면 주민이 해안가에서 고무보트와 배낭 2개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수색작전 끝에 간첩 3명 사살. 피해(경찰관 4명 부상)



1969, 7. 24 GOP 부대 공비 사살사건.

철책 경계병이 약 15m 전방에서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3명 사살





1969, 10. 12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잠복호 근무자가 철책선 남방 5 m지점 능선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발견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였고, 9월 8일 경기도 가평에서

조장 김은환을 검거. 피해(전사 3명, 부상 5명)



1969, 10. 14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연대 수색중대 잠복호에서 8명이 근무중 전방 10m 지점에서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1명을 사살. 피해(경상 1명)



1969. 12. 11 KAL기 납북사건.

KAL(YS-11)기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가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원산으로 기수를 돌렸다.

북한 방송은 창랑호 피랍 때처럼 "자진 입북했다"고 보도했다.

납치 66일 만인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중 승객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돌려 보냈으나 승무원·승객 12명(납치범 포함)의 송환은 지금까지 거부하고 있다.



1970, 3. 8 영덕해안 간첩 사살사건.

해안초소 근무병이 해안순찰중, 동력보트와 적탄통을 발견, 수색작전 끝에 해병대 병력이 간첩 2명 사살.

1970, 3. 13 DMZ 공비 사살사건.

연대 수색중대 병력이 GP 동쪽 300m 지점에서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피해(부상 2명)

1970, 4. 8 금촌 침투간첩 사살사건.

경기 파주 금촌 거주 농민이 은신중인 간첩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 으로 전원 사살.

1970, 4. 29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사단 수색중대 매복조가 100m 전방에서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끝에 2명사살. 피해(부상 2명)

1970, 4. 29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매복조가 공비 3명을 발견,교전 끝에 전원 사살

1970, 5. 3 안면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검거간첩을 역이용, 안면도에서 접선공작을 실시 침투한 간첩 3명을 사살.

1970, 6. 13 전방사단 공비사살사건.

연대 잠복초소 근무병이 우측방 개울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 2명을 사살

1970, 6. 15 미군부대 공비 사살사건.

장단반도 거곡리 제1초소에서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끝에 1명 사살

1970, 6. 18 전방사단 공비 출현사건.

연천군 초성리에서 아군 병력이 잠복근무중 공비 1명이 출현, 권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부상을 입히고 도주.

1970, 6. 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북한 간첩이 국립묘지 참배요인을 살해하기 위해 현충문에 폭발물을

장치 하다가 실수로 간첩 1명은 폭사 하였고, 잔당은 도주.

1970, 6. 28 영흥도 간첩선 격침사건.

아군초소 경비정이 영흥도 북방에서 간첩선을 발견, 합동작전으로

격침시키고 내륙으로 상륙한 공비 6명 사살.

1970 6. 30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까치봉 서남방 철책선 부근에서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1970, 7. 5 김포 계양산 간첩 사살사건.

경기 김포 고촌면 뒷산에서 학생이 거동 수상자를 발견 신고하여, 출동한 군 병력이 3명 사살.

1970, 7. 22 영덕 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경북 영덕 해안초소 앞 50m 해상에서 간첩선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합동작전으로 격침. 17명 사살 추정.

1970, 9. 19 영종도 침투 간첩 사살사건.

영종도 중산리 거주 학생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간첩 2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1970, 9. 22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아군 잠복초소 전방 철책선에서 공비가 선제공격하여 교전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1970, 9. 26 부산 가덕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부산 가덕중학교 학생이 산에서 괴한 2명을 발견,

출동한 경찰·예비군이 2명 사살. 피해(전사 2명)

1970, 10. 6 임진강 수중침투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가 임진강변을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끝에 모두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6명)

1970, 10. 10 거진 간첩선 격침사건.

강원도 거진 북방에서 해군함정이 간첩선을 발견,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휴전선 남방 5마일 해상에서 격침, 4명 사살 추정.

1970, 10. 11 해남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해남 화산면 거주 박양진 집에 거동수상자 1명 출현, 박씨의 처가 신고, 경찰이 사살.

1970, 10. 14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가 박달봉 정상 10m 부근에서 공비 2명을 발견, 사살.

1970 10. 18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GOP에서 소대장 외 1명이 철책선 점검 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1970, 10. 22 GOP 사단지역 간첩 복귀사건.

철책선 순찰병이 이상한 소음을 청취후 수하시 총격을 받고 교전,수색결과 철책이 절단되어 있어 간첩의 복귀로 판단하였음.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1970, 10. 22 전방 사단지역 공비 침투사건.

백석산 동북방 GP 외곽 철책부근에서 소음을 청취하고, 접근하다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후 확인한 결과 철책 2개소 절단 및 도주흔적 발견.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1970, 10. 24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매복조가 향로봉 서북방 8㎞ 지점에서 공비 3명을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1970, 11. 7 인천지역 간첩 생포 및 사살사건.

인천 율도 발전소 예비군 초병이 해안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하고 수하하자, 초병을 살해하고 도주. 출동한 군 병력이 1명 사살,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1971, 6. 16 전방사단 침투 공비 사살사건.

연대 수색중대 병력이 철원군 백마고지 서남방에서 매복근무 중,

20m 전방에서 접근하는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1971, 6. 18 석모도 침투 공비 사살 및 생포사건.

경찰이 강화 석모도에서 북한장비를 발견,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부상 1명)

1971 6. 30 임진강 침투 공비 사살사건.

사단수색중대 병력이 임진강변에서 잠복 근무중 공비 3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끝에 2명 사살,1명 자폭. 피해(전사 4명, 부상 12명, 장갑차 1대 전소)

1971, 7. 1 GOP부대 산병호 침투공비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산병호 경계근무중 수중철책선 하단부를 굴토하고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2명 사살 잔당 도주.

1971, 8. 16 DMZ 공비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DMZ 수색중 공비 5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1971, 8. 19 군단 하교대 공비 출현사건.

군단 하교대 부사관 후보생이 보초근무중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비는 도주하고 기관단총, 피묻은 붕대,배낭 등을 노획.

1971, 8. 20 강화도 침투안내원 사살사건.

강화군 길상면 거주 민간인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신고. 수색작전끝에



안내원 2명사살. 피해(전사 2명)

1971, 8. 21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매복근무중 괴한 3명을 발견, 교전끝에 공비 3명 사살. 피해(부상 1명)

1971, 8. 27 임진강 수중침투 간첩 사살사건.

사단 경계병이 임진강 해안에서 괴물체 4개를 발견, 수색작전을 전개한 군 기동타격대가 간첩 4명 사살. 피해(전사 1명,부상 1명)

1971, 9. 13 월성 해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 해안에서 공비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피해(경상 2명)

1971, 9. 18 해병여단 공비 사살사건.

김포군 양촌면에서 민간인이 괴한 4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해병과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9명, 부상 20명)

1971, 10. 25 DMZ 침투공비사살사건.

DMZ 매복 근무자가 철책선 북방 50m 지점에서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2명 사살.

1971, 10. 30 전남 소허사도 간첩 사살 및간첩선 노획사건.

전남 소허사도에 괴선박 1척이 출현 하였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산으로 도주하는 간첩 4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하고 유기한 간첩선 나포. 피해(전사 1명)

1973, 4. 17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매복근무중 공비 3명이 침투하는 것을 발견, 교전 끝에 2명은 사살, 잔당은 도주.

1973, 5. 5 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완도 거주 주민 4명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검거하려다 권총에 맞고 부상,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 1명 사살, 1명 행방불명.

1973.3.7 3사단(백골) 사단 ,백골 부대원을 향해 기습사격! (DMZ 표지판 보수작업 중에)

백골부대 장병 2명이 중상을 입었다.105미리, 155미리 포로 적진지에 포격을 가하였고, 북은 전군비상령에, 전군 동원령이 내리고.. 보복포격으로 30여 명이 사망

1974, 4. 2 리비교 공비침투 및 복귀사건.

대대 후문 보초병이 도로에서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수하 하자. "11중대 병력이다”라고 하여

암구호도 확인하지 않고 통과시켜 북상 도주.

1974, 5. 20 추자도 간첩 사살사건.

간첩 2명이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본가에 출현한 것을 조카가 신고,

출동한 군·경이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피해(전사 3명)

1974, 7. 20 어청도 근해간첩선 격침사건.

해군 함정이 격렬비열도 25마일 해상에서 의아선박을 발견, 추격하자 사격하며 도주함으로 집중사격으로 격침. 간첩사살 7~8명 추정. 피해(경상 3명)

1974.8. 15 육영수 영부인 피살사건.

8.15 경축행사때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저격에 박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육영수 여사는 목숨을 잃었다.

1975, 4. 27 동래 침투간첩 검거사건.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 거주 민간인이 산에서 거동 수상자 2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군·경은 간첩 1명 체포, 5월 3일 간첩 추가 검거.

1975, 6. 28 광주 침투공비 사살사건.

광주시 서구 동운동 뒷산에서 괴한 2명 발견하여 신고, 군·경은 추격 끝에 1명 사살, 1명 도주, 8월 1일 전북 완주에서 사살.

1975, 9. 11 고창 침투공비 사살사건.

전경대 해안초소 경계병이 순찰중 괴한 2명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교전, 1명 사살, 1명 도주 피해(전사 3명, 부상 2명)



1976, 6. 19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GOP 근무자가 북한강변 철책선 부근에 서 공비를 발견,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4명, 부상 6명)

1976, 7. 3 완도 공비 침투사건.

전남 완도군 금일읍 화목리 거주 주민 3명이 약초 채취차

구도(무인도)로 건너간 후, 1명은 공비의 권총에 맞아 살해되고, 2명은 후일 생환.

1976, 8. 18 도끼만행 사건.

휴전선에서 인민군이 도끼로 미군장병 2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는 한미군 합동으로 전쟁불사 위협으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냈다.

1977, 5. 3 GOP부대 공비 복귀사건.

초병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기습사격 으로 전사, 수색결과 철책절단 및 복귀흔적 발견

1978, 10. 5 GOP부대 공비 강습복귀사건.

병사 4명이 전역 및 휴가신고 차 연대본부로 가던중 공비의 기습사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신고로 작전을 전개 하였으나 철책을 뚫고 북상 도주.

1978, 11. 4 광천 침투공비 민간인 살해 도주사건.

충남 광천 말봉산에서 나무하러 갔던 여인 2명이 공비에게 살해되고, 도주하면서 주민 3명을 추가 살해하고 도주.

1979, 10. 5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GOP 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철책절단 및 침투흔적 발견,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대암산 서남방 2㎞지점에서 공비 1명 사살.

1980, 3. 23 한강 수중침투 공비사살 사건.

초병이 경기 고양 법곳리 한강변으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전원 사살.

1980, 3. 27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DMZ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1980, 6. 20 보령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 초병이 괴선박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격침후 간첩 김광현 생포 피해(부상 2명)

1980, 11. 3 전남 횡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완도군 횡간도 거주 어민이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전원 사살. 피해(사망 1명, 부상 6명)

1980, 12. 1 경남 남해침투 간첩선격침사건.

레이더가 남해 목도 남방 7㎞ 해상에서 괴선박 포착,

육·해·공군 합동 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9명 사살 피해(전사 3명, 부상 3명)

1981, 6. 10~6. 21 임진강 수중 침투 공비 복귀사건.

철책선 경계병력이 임진강에서 배낭을 습득 조사한 바, 무장공비 3명이 6월 10일 임진강으로 침투, 구파발 지역에서 군사시설 촬영후, 6월 21일 복귀하다 분실한 배낭으로 확인.

1981, 6. 29 필승교 수중 침투 공비 사살사건.

필승교 경계병이 다리 밑으로 떠내려가 는 물체를 발견하고, 사격하였으나 수중 동물로 오판,

그후 공비 유기물이 발견되어 작전 끝에 논두렁에 은신중인 공비 1명을 사살. 피해(부상 1명)

1982, 5. 15 해안 침투공비 사살사건.

해안초소병이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지경리 해안으로 접근하는 괴한 2명을 발견,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1983, 6. 19 일월교 침투공비 사살사건.

초병이 파주군 문산읍 임월교 다리 밑으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집중 사격으로 전원 사살.

1983, 8. 5 월성해안 침투 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군 양남 수렵리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



해. 공군 합동작전으로 5명 사살. 피해(해경정 1척 침몰)

1983, 8. 13 독도근해 간첩선 격침사건.

독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강원함이 남하 하는 의아선박을 발견, 정선을 명했으나 도주,

함상헬기가 출동 격침, 19명 사살 추정.

1983. 10. 9 아웅산 테러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83, 12. 3 부산 다대포 침투간첩 생포사건.

해안 초병이 부산 다대포 해안 매복근무 중 침투하는 간첩 2명을 발견,

격투 끝에 생포하고,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3명 사살.

1984, 9. 24 대구 무장간첩 출현사건.

대구시 동구 신암2동에 무장간첩이 출현, 미용실 여주인과 식당 종업원 등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

1984, 10. 19 부산 수영만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레이더가 수영만 동쪽 1마일 해상에서 의아 선박을 포착, 해군 PK편대가 출동 교전 끝에 격침. 5명 사살 추정

1987.11. 29 KAL858기 폭파사건.

주범 김현희로 하여금 중동 건설근로자들이 많이 탑승한 KAL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폭팔케한 사건.

1992, 5. 22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무장공비 3명이 아 GP 남방 800m 지점에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발견하고, 전원 사살.

1995, 10. 17 임진강변 무장 공비 사살사건.

GOP 경계병이 전방 20m 절벽 아래에서 공비 1명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사살.

1995, 10. 24 부여 무장간첩 사살 및 생포사건.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사 입구에 무장 간첩 2명이 출현,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1996, 9. 17 강릉 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강릉시 강동면 고속도로 상에서 택시 기사가 암초에 좌초된 잠수함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공비 25명 소탕, 잠수함 노획. 피해(전사 11명, 부상 41명)

1998, 6. 22 속초해안 잠수정 침투사건.

속초 동남방 11 . 5마일 해상에서 어민이 어망에 걸린 잠수정을 발견하고 신고,군·경 합동작전으로 잠수정 예인, 자폭시체 9구 인양, 조사결과 무장간첩으로 확인.

1998, 12. 18 남해안 침투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 레이더에서 간첩선 포착, 해·공군 합동작전을 전개, 욕지도 남방 5 6마일 해상에서 격침. 반잠수정 1척, 공작원 1명 포함 사체 6구 인양, 간첩장비 1,209점 노획.

1999, 6.15 연평해전.

북한 함정 수십척이 NLL을 넘어 우리 해군고속정에 포격을 가해오자 우리 해군 2함대 박정성 사령관이 발포 명령하거 응사하여 북한함정 2척 침몰 2척 대파 북한해군 수십명 사살하고 퇴각시켜으나.

훈장을 받아야할 박제독은 북한의 요청이라는. 김대중에 의해 보직해임 발령을 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2002, 6. 29 서해교전.

연평해전의 복수극으로 여겨지는 북한함정의 기습포격 공격에 우리해군 전사자 6명 부상자 수십명 발생. 공격을 못하게하고 선미추돌(船尾追突) 대응만 하라는 당시 대통령 김대중 지시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전쟁이었다.







2007, 7. 12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주부를 금지구역에 들어왔다고 총격을 가해 사살한 사건

2009. 11. 10: 대청도 사건.

북한 해군 선제공격에 집중포화로 적함을 반파시켜 퇴각시킨 사건.

2010. 3 26: 천안함 초계함 격침사건.

지난해 대청도 사건의 보복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서 북한 어뢰나 기뢰공격에 천안함이 두 동강난 사건.

2010.11.23 연평도 포격사건

오후 2시 30분 부터 약 1시간 가량 우리 군의 해상사격훈련이 끝난 뒤 북한이 해안포를 수십발을 연평도와 인근 해상으로 발사

피해사항(병사2명전사,민간인2명 사망

2011년 1월11일. Js- Kim



ROTC Guguk Yonhap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

대한민국 ROTC 救國연합









추천 : 89











*자살한 노무현 마누라 권양숙과 15명의 좌익수괴들*

작성자 : 김성 작성일 : 11-05-24 조회수 : 57 추천수 : 5 번호 :315,895


여론 1번지 *자살한 노무현 마누라 권양숙과 15명의 좌익수괴들* 부추연

자살한 발갱이 가문인 노무현 마누라 권양숙은 23일 김해

봉하마을 사전에서 핵심 인사 15명과 점심



이해찬 한명숙 손학규 김원기 임채정 정세균 박지원 김진표

이정희 유시민 안희정 이광재 송기인 강만길 강금원



중도성향의 손학규 문재인 이라고 하는데 이명박은 500만표

압도적 지지 받고도 중도 선언으로 국민 배신했습니다



이 인간들이 모인 것은 내년 총선 대선이겠지만

김정일이 중국 방문과도 관련 있습니다



좌익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안않고

수백억 달러 쏟아부어도 북한 경제 발전 안시켰는데

중국 방문이 북한 경제발전위한 경협때문이라고 방송사들이

바람잡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내년 기습 남침용 최신무기 구입때문이면서

중국이 김정일 지지 지원하는 것처럼 꾸밀려는 과시용입니다



내년 총선 대선에 권양숙 발갱이들이 수단방법 가리지않고

죽자살자 달려들것입니다



남북한 좌익들이 내년 총선 대선을 철처하게 이용하므로

국민들이 정신 바싹 차려야 합니다



박근혜는 자나깨나 신변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 오전에 앞집에 젊은 남자가 와서 계속 화장품 파는 것처럼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자주 남자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창문 가까이 갈 수 없고 또는 창문가 가가운 방 가운데도 앉을

수가 없습니다.이럴 때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방안이라고 안전 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바로 옆에서 24시간 지켜보지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살인자가 깔려잇는 아주 무서운 나라입니다





김 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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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 5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부추연)

[좌파 박멸]*부산저축은행 부정대출 7천억원은 민주당 선거자금*

작성자 : 김성 작성일 : 11-05-16 조회수 : 43 추천수 : 6 번호 :315,584


여론 1번지 [좌파 박멸]*부산저축은행 부정대출 7천억원은 민주당 선거자금* 부추연

어제 밤 KBS9시 뉴스에서 부산저축은행 임직원들의 친인척들이

부실 대출받아 지난 3월 말 기준 금액이 무려 7천억



조선이 보도대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인 2001년 2005년 시흥시 납골당 1200억,

문래동 수백억 빌딩 묻지마 투자 등 수천억 투자는 부산저축은행 광주일고

경영진의 치밀한 계획적인 부산시민 굶어 죽이기 위한 2003년 불난 대구지하철에

문 잠그고 가서 백여명 죽인 짓과 같은 살인짓입니다



부산저축은행 광주일고 경영진의 배후는 민주당읩 박지원같은 인간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

부산저축은행 회장 부회장 행장 감사2명이 광주일고 출신과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에 있는 호남 사람들이 적극 지원과 민주당이 배후 노릇 안하면

통 크게 부실대출 7천억할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공격해야 함에도 오히려 조용히

있습니다.민주당이 배후이기 때문입니다



부실대출 7000억중에 내년 총선 대선 대비한 선거용 자금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부산저축은행 광주일고 경영진이 이런 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짓은

경찰 판검사에 있는 김대중 노무현 추종 경찰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2006년에 부산저축은행처럼 언론사에 도배한 금융브로커 김재록을 같은 전라도

고향인 문용선 재판장이(지금은 서울고법 민사수석부장판사,저는 선거법과

노무현 명예훼손죄로 실형 10개월 선고한 자)보석으로 풀어주고 집행유예

선고했습니다.



당시 서울구치소에서 김재록 보니까 매일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대검 중수부에

가서 조사 받았습니다. 보통 서울지검에 한두 번 가서 조사 받으면 끝

이런 중재인을 집행유예 선고는 김대중 고향 추종 문용선 판사만이 가능합니다

거물간첩 송두율도 집행유예 선고한 판사도 있습니다



이런 판검사들이 전교조 교사 PD수첩같은 큰 공안사건도 무죄 또는 가볍게

처벌로 좌익들이 날뛰게 하는 주범들입니다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전라도가 아닌 김진표가 왜 당선됐겠습니까?



부산저축은행 광주일고 경영진 배후가 민주당에 있는 전라도 출신 박지원

같은 의원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전라도 출신 아닌 의원들이 똘똘

뭉쳐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추종 국회의원들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내년 총선 대선에

올인하는 증거입니다



한나라당에 있는 운동권 출신 좌익인 이재오 김문수 원희룡 김성식 등과

운동권 출신 아니지만 좌익인 남경필 정두언 정의화 같은 인간들도

한나라당 필패 노리면서 좌익세력 확장 노리고 물불 안가리고 수단

방법 동원해서 온갖 음모짓입니다.주범은 골수 좌익 이재오 김문수입니다



김 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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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부추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