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박원순만 보면 우리나라 엄청 가난하다
작성일 : 14-10-23 23:16
글쓴이 : 만세반석
조회 : 116 추천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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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만 보면 우리나라 엄청 가난하다 http://blog.chosun.com/linegang/7572987 1. 월 250만원 짜리 강남 아파트에 월세로 삼 2. 30만원대 에르메스 넥타이 3. 60만원대 까르띠에 허리띠 4. 딸래미 스위스 유학 - 스위스 무지 비싸니 최소 월 200은 든다. 5. 아들 롯데 이사랑 결혼시킨후 미국 보냄 -- 엄청난 호화 결혼비용은 ? 6. 몇천씩 하는 성형 수술 비용 이정도 레벨이 되야 겨우 꺼낼수 있는 말 "제가 워낙 가난해서요..." 에라이 씨팔 일베원본 : http://www.ilbe.com/4539363398 |
김영환 폭로 통진당 의원이 요청 고급정보들
여의도에 미친 똥개 3마리가 지랄 발광을 한다!!
작성일 : 14-10-23 08:55
글쓴이 : 만세반석
조회 : 168 추천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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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osun.com/cjimbc/7571847
박지원 이재오는 원래 같은부류의 정치인이다
이들이 대한민국 정치에 있는 한
대한민국 정치는 영원한 3류정치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그런데 개헌발언으로 김무성이 3류정치인 대열에 끼었다
김무성의 정치적 DNA는 항상 배신을 바탕으로 한 양다리 걸치기정치다
전형적인 김영삼의 정치 수법이다
역대 야당의 모든 정치인들이 그랬다
김영삼이 박정희 대통령을 물고 늘어져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냈고
그 밑에서 배운 김무성도 여전히 박근혜를 상대로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이어가려 하고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옛 한나라당 시절 부터 박근혜와 각을 세워
스스로의 존재감을 나타내려 했던자가 바로 이재오였다
이재오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입지는 과대망상에 빠져있다
박지원과 이재오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의 중심에 있는것 같지만
사실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것이다
여기에 DNA가 같은 김무성이 끌려 들어가고 있다고 보면 더 정확할 것이다
김무성도 이번 개헌 발언으로 대통령과의 신뢰가 깨졌다고 보면된다
옛날 MB정부때 이재오와 손잡고 박대통령과 등을 돌린 기억을 상기시켰다
여전히 지금도 김무성은 배신의 DNA를 가진 정치인이라는것
김영삼의 정치적 틀에서 벗어날수 없는 작은 꼼수 정치인이라는것
박지원 이재오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정치적 스타일이라는것
이번 개헌 발언으로 적나라하게 들어 났다고 보면 된다
이재 김무성은 홀로서기를 해야 할것이다
새누리당을 이끌어 가기도 힘들게 생겼다
김무성은 친박들에게 믿을수 없는 정치인으로 낙인 찍힌 이상
이제 앞으로 친박과의 일전은 염두해 줘야 할것이다
이재오와 박지원 그리고 김무성
이 세 사람이 지금은 잠시 반짝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보는 견해는 다음 총선때 모두 퇴출 또는 후퇴할 인물들이다
김문수가 바로 이들을 경계하며 치고 나오는 모습이 오히려 더 고단수의 정치인처럼 보인다
개헌 발언으로 김무성은 박대통령의 동앗줄을 놓쳤고
박지원 이재오의 썩은 새끼줄을 잡았다고 보면 될것이다
결국 김무성은 김영삼 한테 배운 양다리 걸치기 정치로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 시켰고 험난한 정치적 앞날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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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유가족과 단원고 유가족의 180도 다른 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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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민련 없는 판교 환기구 사태는 57시간 만에!
작성자 : 동남풍 작성일 : 14-10-21 조회수 : 68 추천수 : 4 | 번호 :51,224 |
새민련이
끼어들지 않은 판교 환기구 붕괴참사는 특별법이니 수사권ㆍ기소권 없이 57시간 만에 해결되었는데, 새민련이 끼어든 세월호는 188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그렇다면,
왜 새민련이 판교 환기구 참사에는 끼어들지 않고 세월호 참사에만 끼어들었을까?
그것도
일반인 유가족은 팽개치고 단원고 유가족 하고만 결탁하여!
단원고
학부모라는 특정집단을 타깃으로 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서는 아니고?
만일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는 종북컨트롤타워가 사전기획한 대로 새민련이 움직여주었다는 것이 되는데?
궁극적으로
새민련이 종북세력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멀쩡하게
남쪽으로 항해하다가 북쪽으로 J커브 틀면서 역행한 것?
어째보면
선박증축ㆍ화물과적ㆍ선박평형수라는 가짜이유를 침몰원인으로 꿰어 맞추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왜
‘쾅’하는 폭음 후에 화물이 기울어 ‘쿵’하며 떨어졌다던 최초보도를 기우뚱~쿵으로 변질시키려고, 선박증축ㆍ화물과적ㆍ선박평형수라는 가설의
과잉보도로 사실로 왜곡하던 것도 J커브가 아니었으면 발생할 이유가 있었나?
그래,
J커브 젖혀두고 그 가설이 사실이라고 전국민적으로 속아주자.
그런데
동정해주는 사람에게 누명 씌우듯 그 원인과 책임을 송영길이 놔두고 왜 박근혜 정부에다 돌리냐?
그래
이제야 박근혜 정부 닦달하던 단원고 유가족이 청해진 해운 찾아가서 이제야 “과적하지 마라”고 떠들었다면, 늬들 속도 빤한 것 아니었나
말이다.
어쨌든,
둘 다 국가적 공로도 아닌 일이긴 매한가지인데, 새민련이 발뺌한 판교 환기구 붕괴참사는 57시간 만에 깔끔하게 합의된 반면, 새민련이 끼어든
세월호는 특별법이니 수사권ㆍ기소권인 떠벌이며 188일이 지나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점에서 진정 국가발전 저해요소가 과연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끝>
<부추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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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닮은 김구, 치사하고 간사한 반역자
작성일 : 14-10-23 16:31
글쓴이 : 지만원
조회 : 2,171 추천 :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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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닮은 김구, 치사하고 간사한 반역자
10월 22일 오후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KBS-국정감사 현장에 이인호 KBS이시장이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발언을
하였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독립을 반대한 분이기에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그를 거론하는 게 옳지 않다. 상해 임시 정부는 임시
정부로도 평가받지 못했고 우리가 독립국 국민이 된 것은 1948년 8월 15일 이후다."(이인호)
야당은
"김구가 대한민국 공로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물고 늘어졌다. 김구를 모욕한 망언이라는 것이다. 편협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KBS 이사장의 자격이 없으므로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온갖 빨갱이 언론들이 쌍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이인호 이사장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빨갱이들은 또 이승만 및 4.3폭동에 대한 역사관,
전교조의 정체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인호 교수의 시각과 야당-빨갱이 시각이 정반대다. 입만 열면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빨갱이들이, 다양한 ‘다름’을 수용하자고 목청을 올리던 빨갱이들이, 정작 자기들의 시각과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을 향해 집단적 언어폭행을 가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빨갱이들에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선과 아집과 몰염치함 때문에 빨갱이들이 북한의 독재체제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면
김구가 어떻게 더러운 인간인지, 아래에 간단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이 밝히는 김구
1982년 평양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114쪽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남조선의 우익 정객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에 있어서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단정’입니다.
그러므로 현하 우리의 공통한 투쟁목표는 단선단정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김구)
이어서
115쪽에는 또 이런 대목도 있다.
"특히 김구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와 넓으신 도량, 우리 당의 통일전선 정책에 깊이 감동되어 수령님께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자기가 평양에 와서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산주의자도 공산주의자 나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국애와 민족애가 없는 사람은 무슨 주의든 나는
반대요. 그러나 장군님의 공산주의는 절대 찬성입니다. 나는 이번에 여기 와서 그분처럼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시는 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조선을 바로 잡고 이끌어 나가실 분은 그 분밖에 없는 데 그분의 공산주의를 내가 왜 반대하겠습니까! 장군님의 공산주의야 말로 누구나
절대 찬성할 공산주의요, 내가 일찍이 장군님을 알았던 들 벌써 그분을 받들어 왔겠는데 이제야 참된 애국자를 알았으니 나는 늦게나마 장군님을
받들어 나의 여생을 바쳐나가겠습니다.” (김구)
위
두 가지 김구의 발언은 1948년 4월 19-23일간 평양에서 열린 ‘사회단체대표련석회의’에서 했던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 문헌들에도 기록돼
있다.
조선일보가 전한 김구의 평양 발언
“실제로 평양회의는 1948년4월19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됐다. 4.19일, 김구는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줄줄이 누운 부하들을 피해 담장을 몰래 넘어 4월20일에 평양에 갔지만 4.22일에야 비로소 회의장에 초대됐다.
22일 회의에서 김구,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가 주석단에 보선됐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이런 축사를 했다. 조선일보 1948.4.24. 보도에는 김구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돼 있다.
“위대한 회합에 참석하여 기쁘게 생각한다. 조국이 없으면 국가가 없으며 국가가 없으면 정당이나 사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단선(남조선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남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선일보 1948.4.24)
남노당 지하총책 박갑동의 증언
아래는
당시 남로당 지하당 총책이었던 박갑동 선생의 증언이다(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1946.6.3일, 이승만은 소위 ‘정읍발언’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 천명했다. 1947년 8월 12일
해체되고,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남북 노동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방지하기 위해 김구를 활용하기로 했다.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이승만과 한민당에 주도권이 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김구의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에 착안 한 것이다. 평소 김구와 아주 가까운 홍명희를
시켜 김구를 설득했다. 두 사람은 “단독정부는 미국과 이승만의 음모이므로 깨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때 김구는 북한의 스케쥴에 따라 연석회의를 연다는 것에 합의했다. 홍명희는
김구에게 ‘김구, 김구식 이름으로’ 먼저 북한에 연석회의를 제의하라 했다. 김구가 연석회의 제안을 보냈는데도 김일성이 무시했던 것은 순전히
각본에 의한 연극이었다. 이를 성공시킨 홍명희는 1949년9.9일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당시 부수상이 되었다. 김구의 덕에 홍명희가 출세한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만일 선생이 오시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돼도 북한에서는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을 믿고 북한을
다녀온 김구는 “양쪽에 다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 되지만 통일국가를 세우면 김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을 가진
듯 했다.
북한은
당시의 김구의 방북 대목을 “위대한 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KBS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김구는 김일성을
장군으로 불렀다. 김구가 김일성 한테 읍하고 “김일성 주석님, 받으십시오”하며 임시정부의 옥쇄를 바치는 장면도 나왔다.
영화의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통일이 되면 주석께서 황해도 고향에다 몇 편 주면 과수원이나 하며 말년을 지내겠다” 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가며 “지난 날 장군님을 몰라 뵙고 반공운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1997년 노동신문이 밝힌 김구
1997년 5월 26일(월), 로동신문은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신념과 절개를 목숨 바쳐 지킨
성시백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두고-”라는 제목으로 장장 2개면에 걸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실었다.
이하 로동신문의 글
1946년 11월11일,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이달 호에 “20여년간 해외에서 독립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명 선생 일행 서울착”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열혈청년 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자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 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정향명,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정향명은 해방 전 독립운동 시기에 이국땅에서 부른 성시백동지의 가명이었다. 성시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근 반세기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나간 전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92년 12월에 성시백 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성시백 동무는 나를 위해, 자기 당과 자기 수령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싸운 충신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
지하혁명 투쟁사에는 이름 있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위훈담들은 공작내용과 활동범위로 보나 투쟁방식으로 보나
성시백동지의 지하공작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1947년 정초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고저 서울을 떠나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 . .
“장군님 말씀을 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당장 남으로 달려나가 장군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싸우고
싶은 것뿐입니다. 룡마를 타고 장검을 비껴든 것만 같습니다”. . . . .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 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만나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 . ”
김구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와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이렇게 드리대었다.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었다. . . . .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고 물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선생의 얼굴이 크나큰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주실 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주시었으니 기어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 . . . .
1950년 6월 27일 5시, 적들은 이 새벽에 성시백 동지를 사형장으로 끌어내었다. 성시백 동지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친
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기 24시간 전이었다.
결 론
위의
자료들만 읽어봐도 김구는 참으로 더러운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을 어째서 빨갱이들은 김구를 빨까? 김구는 배운 것이 겨우 한문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우물안 개구리였고, 편협한 성격에 고집불통이었다. 힘이 장사이고 권총을 좋아했다.
1948년 5월 10일, 인구비례로 북한의 국회의원 100석을 남겨두고 20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1948.5.31.
국회는 189 대 8 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17.일 유사 이래 최초의 민주헌법을 발표했고, 이 헌법에
따라 7.20. 이승만은 200명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김구는 겨우 16표를 얻었다. 당대의 인물은 당대의 사람들이 평가한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썼고, 이광수가 쓰면 고양이가 호랑이로 미화된다. 빨갱이들은 오죽 우물 안 개구리들이면 겨우 ‘빈 라덴’과에 속하는
기회주의적 반역자를 최고의 영웅으로 모시고 살겠는가? 김구는 김일성의 부나비였다.
2014.10.23.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
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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