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침공 뒤, 핵 카드 꺼낸 김정은의 치명적 실수
가상 시니리오(3)/중국인 100만, 미국인 20만, 일본인 6만 명이 있는 한국을 핵으로 공격한다면...
백령도 점령 작전 뒤 핵카드 꺼내다
한 달 뒤 김정은은 막다른 심정으로 백령도 침공 작전을 명령한다. 박헌영처럼 남한의 종북좌파 세력이 협조해줄 것을 기대한다. 기습을 받은 백령도의 한국 해병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날씨가 나빠 공중지원을 받지 못하여 3개 사단의 북한군에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약3000명의 한국군이 포로로 잡혔다. 수천 명의 주민들도 적 치하(治下)로 넘어갔다. 이때 백령도에 관광차 왔던 중국 국적의 조선족 100여 명이 죽었다. 김정은은 백령도 점령에 성공한 다음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요지는 ‘이로써 서해 북방 한계선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만약 적들이 반격하면 핵무기 사용도 검토한다.’ 포로로 잡은 군인과 민간인은 협상을 통하여 돌려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3일 뒤 한미군은 합동으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백령도를 점령한 북한군과 대안(對岸)의 북한군 군단 사령부와 잠수함 기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백령도 수복을 위한 상륙작전은 미국이 급파하기로 한 두 척의 항곰모함이 도착한 이후로 예정되었다.
다음날, 김정은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이름으로 최후통첩을 한다.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 계속 도발하면 우리는 한국의 한 도시를 핵으로 공격하겠다. 미군이 개입하면 괌과 오키나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김정은은 북의 통첩이 공갈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핵실험을 한다. 서해의 무인도를 향하여 50kt짜리 핵탄두 실물을 장착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 실제로 폭발시킨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 회원국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응징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악에 따라 한국에 대한 북한의 침공을 미국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 공동 대응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두 대통령은 또 북한이 핵사용을 위협하였으므로 미국도 확장억지 정책의 원칙에 입각, 북한에 대하여는 핵무기 사용 권한이 있음을 선언하였다.
두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에 전술핵이 이미 배치되어 있음을 공개한다. 두 나라가 비밀리에 미군기지 안에 전술핵을 반입하였고, 전시(戰時)상태인 지금부터는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한국에 배치된 전술핵은 150kt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수소탄으로서 전폭기에 의한 정밀 타격이 가능하고 지하를 뚫고 들어가 터지므로 김정은이 숨어 있는 지하시설에 대한 파괴력을 최대화시키는 반면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어 방사능 오염도 줄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설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있는 20만 명의 미국인을 대피시키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군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징후를 30분 전에 포착할 수 있고 그때는 선제공격으로 파괴할 것이다. 이 위기는 인류 전체의 문제이므로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비장하게 말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일본 정부는 유엔군 후방사령부의 관리 하에 들어간 7개 주일(駐日)미군기지로부터 발진하는 항공기와 군함이 한국에서 작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이때 만주 지역에 배치된 중국군이 압록강 접경지대로 전진,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현지에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중국, 김정은에게 최후 통첩
백령도 침공 6일 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직접 텔레비전에 나타나 입장을 표명한다.
“우리는 수개 월 전에 이미 북한이 무력 공격을 당하면 북한을 지원할 것이고 북한이 먼저 공격을 하여 반격을 당할 경우엔 중립을 취할 것임을 미국 측에 알렸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는 한반도 사태에 무력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북한 당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선언을 취소하고 백령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중국은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음을 선언한다. 한국에는 약100만 명의 중국 국적자가 머물고 있음을 북한 당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의외로 차분하게 반응하였다. 국제사회가 신속하게 대응하고 한미군(韓美軍)이 백령도 수복작전을 시작한 데다가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선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비상계엄은 계엄사령관이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다. 행정뿐 아니라 사법(司法)도 계엄사령관 지휘로 넘어간다.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이 장성 중에서 추천,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방장관은 육군 참모총장을 추천하였다. 함참의장은 연합사령관과 함께 함께 대북(對北) 전략을 지휘해야 하므로 육군총장이 맡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행정과 사법까지 계엄사령관 지휘 하로 넘어가고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을 통하여 보고를 받아야 함으로 자연스럽게 계엄사령관이 권력의 새 축이 되었다.
일부 종북 시위대가 반전(反戰) 시위를 하려다가 군대가 출동하기 전에 시민들의 뭇매를 맞고 흩어졌다. 좌파 시위꾼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에는 핏발이 돋았다. 한국의 좌파가 벌여온 관념의 유희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였다. 지식인은 전쟁이란 벽에 부딪치기 전까지는 궤변을 끝없이 널어놓을 수 있다고 했다. 전쟁에 직면하면 생존투쟁을 에너지로 하는 애국심이 계급투쟁론을 누른다는 말이 실증(實證)되는 순간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한국의 자칭 진보세력은 생활좌익으로서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살 길을 찾아 숨는 길을 선택하였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김일성에서 북한군이 남침하면 20만 명의 좌익들이 궐기,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다고 장담하였으나 전쟁이 나자 소멸되었던 현상의 재판이었다. 종북 세력에 기대를 걸었던 김정은의 계산은 또 허탕이었다.
계엄사령관이 맨 처음 취한 조치는 反국가 활동자 예비 금속령이었다. 그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기무(機務)사령관을 불러 지침을 내리는 자리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도와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주문하였다.
“나는 기무사령관을 지낼 적에 먼 데서나마 종북세력의 발호를 걱정하면서 이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국의 반역자들이 돈, 정보, 정책으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미국은 1953년에 율리우스 로젠버그 부부를 간첩죄로 사형 집행하였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형된 유일한 경우입니다. 과학자인 로젠버그는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 정보를 수집하여 소련 정보기관에 제공했었죠.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 어빙 카우프만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습니다. 이런 요지였습니다.”
북의 핵개발 도운 적폐 세력 일제 수사
계엄사령관은 쪽지를 꺼내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살인은 피해자만 죽이지만 당신들은 러시아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더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꾸어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율리우스 로젠버그가 주범(主犯)임은 분명하나 처(妻) 에델 로젠버그도 책임이 있다. 성년(成年)의 여자로서 남편의 추악한 범죄를 막기는커녕 격려하고 도왔다. 피고인들은 목적달성을 위한 신념을 위하여 자신들의 안전뿐 아니라 자녀들도 희생시켰다. 목적달성을 위한 사랑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보다 앞섰다.'
계엄사령관은 이런 날이 올 때를 오래 기다린 사람 같았다. 그는 쪽지를 뒤집더니 뒷면에 메모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의 바탕인 자유민주주의의 존립 그 자체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뻐꾸기는 뱁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이를 모르는 뱁새는 정성껏 알을 품어 부화시킨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알과 새끼를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낸 뒤 둥지를 독차지하고 만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그 전복을 꾀하는 행동은 우리의 존립과 생존의 기반을 파괴하는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통진당을 해산시킬 때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이 결정문의 보충의견에 써넣은 문장이었다.
계엄사령관은 수사 책임자들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의미 있는 말을 덧붙였다.
“적폐 중 가장 큰 적폐는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적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적폐를 젖혀두고 반역자가 애국자를 사냥하는 것을 적폐 청산이라면서 도와준 검사, 판사는 없는지 모르겠네요. 간첩을 골키퍼로 세워놓고는 축구를 할 수 없잖아요?”
검찰총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병서, 김정은을 좌경맹동주의자로 규정 몰아내다
백령도 도발을 명령하였던 김정은은 중국이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무력 개입을 예고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서울 등 대도시에 중국 국적자가 100만 명, 미국 국적자가 20만 명, 일본 국적자가 6만 명이나 체류 중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핵사용을 위협한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백령도 점령 작전을 기획한 부서에선 한국에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고려 대상에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핵사용 위협이 바로 중국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김정은은 처음으로 무력감(無力感)에 휩싸였다.
압록강을 넘어 진격할 태세를 갖춘 중국군에 대응하기 위하여는 휴전선에 배치된 70만 병력 중 30만 명을 빼내어 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만큼 서울에 대한 장사포 타격 능력도 약해진다. 김정은은 이제 문명세계가 자신을 포위망에 가두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허수아비들을 데리고 전쟁놀이를 해왔음도 알게 된다. 전쟁은 군인이 일으키는 경우보다 전쟁을 모르는 독재자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다. 전쟁을 정말 두려워하는 이는 군인이다.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전쟁이 났을 때 피해를 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지휘부도 그런 점에선 다른 점이 없었다.
중국군이 압록강 도하(渡河) 준비를 마친 날 저녁 북한중앙방송은 북한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이름으로 ‘중대 보도’를 내어놓았다. 아나운서는 군복을 입은 남자였다. 발표 요지는 이러하였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긴급 회의를 열고, 조국을 위기에 빠트린 작금의 사태에 책임을 물어 김정은을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기고 결의하였다. 백령도 작전은 김정은이 정치국의 동의 없이 혼자서 결정한 좌경맹동주의적 과오였다. 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수령이 선포하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조선노동당 정치국은 조선인민군이 백령도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으며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약속한다.”
한미연합사는 백령도에서 북한군이 철수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세계 언론은 김정은의 생사(生死)에 대하여 추측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소식통을 인용하는 글이 많았는데 대체로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주동한 궁정 쿠데타로 그림을 그렸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흐루시초프가 비밀경찰 두목 베리아를 제거할 때처럼 황병서가 직접 권총을 들이대어 김정은을 체포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며칠이 지나도 김정은의 생사(生死) 여부와 행방에 대하여는 확인된 정보가 잡히지 않았다.
쿠바 미사일 사건 이후 처음 전개된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세계 사람들이 안도하는 가운데 주식 시장은 과열 조짐을 보였다. 바쁜 곳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였다. 북핵을 도운 적폐 세력 수사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의 수사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사건의 명칭에 ‘적폐’라는 말을 넣을 것을 지시하였다. 대통령은, 수사가 일단락 될 때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뜻도 분명히 하였다.
북한군이 백령도에서 철수한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긴급 전화 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새로운 6자 회담을 제안하였다. 공동 발표문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양국 정상(頂上)은 한반도의 미래가 통일되고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이기를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이란 말을 넣고 싶었으나 시진핑 주석이 반대하였다. ‘자유롭고’라는 말을 받아주었으니 ‘강력하고’는 빼자는 것이었다. 통일 한국의 핵무장을 경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한 달 뒤 김정은은 막다른 심정으로 백령도 침공 작전을 명령한다. 박헌영처럼 남한의 종북좌파 세력이 협조해줄 것을 기대한다. 기습을 받은 백령도의 한국 해병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날씨가 나빠 공중지원을 받지 못하여 3개 사단의 북한군에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약3000명의 한국군이 포로로 잡혔다. 수천 명의 주민들도 적 치하(治下)로 넘어갔다. 이때 백령도에 관광차 왔던 중국 국적의 조선족 100여 명이 죽었다. 김정은은 백령도 점령에 성공한 다음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요지는 ‘이로써 서해 북방 한계선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만약 적들이 반격하면 핵무기 사용도 검토한다.’ 포로로 잡은 군인과 민간인은 협상을 통하여 돌려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3일 뒤 한미군은 합동으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백령도를 점령한 북한군과 대안(對岸)의 북한군 군단 사령부와 잠수함 기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백령도 수복을 위한 상륙작전은 미국이 급파하기로 한 두 척의 항곰모함이 도착한 이후로 예정되었다.
다음날, 김정은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이름으로 최후통첩을 한다.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 계속 도발하면 우리는 한국의 한 도시를 핵으로 공격하겠다. 미군이 개입하면 괌과 오키나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김정은은 북의 통첩이 공갈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핵실험을 한다. 서해의 무인도를 향하여 50kt짜리 핵탄두 실물을 장착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 실제로 폭발시킨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 회원국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응징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악에 따라 한국에 대한 북한의 침공을 미국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 공동 대응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두 대통령은 또 북한이 핵사용을 위협하였으므로 미국도 확장억지 정책의 원칙에 입각, 북한에 대하여는 핵무기 사용 권한이 있음을 선언하였다.
두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에 전술핵이 이미 배치되어 있음을 공개한다. 두 나라가 비밀리에 미군기지 안에 전술핵을 반입하였고, 전시(戰時)상태인 지금부터는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한국에 배치된 전술핵은 150kt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수소탄으로서 전폭기에 의한 정밀 타격이 가능하고 지하를 뚫고 들어가 터지므로 김정은이 숨어 있는 지하시설에 대한 파괴력을 최대화시키는 반면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어 방사능 오염도 줄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설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있는 20만 명의 미국인을 대피시키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군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징후를 30분 전에 포착할 수 있고 그때는 선제공격으로 파괴할 것이다. 이 위기는 인류 전체의 문제이므로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비장하게 말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일본 정부는 유엔군 후방사령부의 관리 하에 들어간 7개 주일(駐日)미군기지로부터 발진하는 항공기와 군함이 한국에서 작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이때 만주 지역에 배치된 중국군이 압록강 접경지대로 전진,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현지에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중국, 김정은에게 최후 통첩
백령도 침공 6일 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직접 텔레비전에 나타나 입장을 표명한다.
“우리는 수개 월 전에 이미 북한이 무력 공격을 당하면 북한을 지원할 것이고 북한이 먼저 공격을 하여 반격을 당할 경우엔 중립을 취할 것임을 미국 측에 알렸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는 한반도 사태에 무력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북한 당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선언을 취소하고 백령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중국은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음을 선언한다. 한국에는 약100만 명의 중국 국적자가 머물고 있음을 북한 당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의외로 차분하게 반응하였다. 국제사회가 신속하게 대응하고 한미군(韓美軍)이 백령도 수복작전을 시작한 데다가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선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비상계엄은 계엄사령관이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다. 행정뿐 아니라 사법(司法)도 계엄사령관 지휘로 넘어간다.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이 장성 중에서 추천,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방장관은 육군 참모총장을 추천하였다. 함참의장은 연합사령관과 함께 함께 대북(對北) 전략을 지휘해야 하므로 육군총장이 맡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행정과 사법까지 계엄사령관 지휘 하로 넘어가고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을 통하여 보고를 받아야 함으로 자연스럽게 계엄사령관이 권력의 새 축이 되었다.
일부 종북 시위대가 반전(反戰) 시위를 하려다가 군대가 출동하기 전에 시민들의 뭇매를 맞고 흩어졌다. 좌파 시위꾼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에는 핏발이 돋았다. 한국의 좌파가 벌여온 관념의 유희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였다. 지식인은 전쟁이란 벽에 부딪치기 전까지는 궤변을 끝없이 널어놓을 수 있다고 했다. 전쟁에 직면하면 생존투쟁을 에너지로 하는 애국심이 계급투쟁론을 누른다는 말이 실증(實證)되는 순간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한국의 자칭 진보세력은 생활좌익으로서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살 길을 찾아 숨는 길을 선택하였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김일성에서 북한군이 남침하면 20만 명의 좌익들이 궐기,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다고 장담하였으나 전쟁이 나자 소멸되었던 현상의 재판이었다. 종북 세력에 기대를 걸었던 김정은의 계산은 또 허탕이었다.
계엄사령관이 맨 처음 취한 조치는 反국가 활동자 예비 금속령이었다. 그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기무(機務)사령관을 불러 지침을 내리는 자리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도와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주문하였다.
“나는 기무사령관을 지낼 적에 먼 데서나마 종북세력의 발호를 걱정하면서 이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국의 반역자들이 돈, 정보, 정책으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미국은 1953년에 율리우스 로젠버그 부부를 간첩죄로 사형 집행하였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형된 유일한 경우입니다. 과학자인 로젠버그는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 정보를 수집하여 소련 정보기관에 제공했었죠.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 어빙 카우프만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습니다. 이런 요지였습니다.”
북의 핵개발 도운 적폐 세력 일제 수사
계엄사령관은 쪽지를 꺼내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살인은 피해자만 죽이지만 당신들은 러시아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더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꾸어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율리우스 로젠버그가 주범(主犯)임은 분명하나 처(妻) 에델 로젠버그도 책임이 있다. 성년(成年)의 여자로서 남편의 추악한 범죄를 막기는커녕 격려하고 도왔다. 피고인들은 목적달성을 위한 신념을 위하여 자신들의 안전뿐 아니라 자녀들도 희생시켰다. 목적달성을 위한 사랑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보다 앞섰다.'
계엄사령관은 이런 날이 올 때를 오래 기다린 사람 같았다. 그는 쪽지를 뒤집더니 뒷면에 메모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의 바탕인 자유민주주의의 존립 그 자체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뻐꾸기는 뱁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이를 모르는 뱁새는 정성껏 알을 품어 부화시킨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알과 새끼를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낸 뒤 둥지를 독차지하고 만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그 전복을 꾀하는 행동은 우리의 존립과 생존의 기반을 파괴하는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통진당을 해산시킬 때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이 결정문의 보충의견에 써넣은 문장이었다.
계엄사령관은 수사 책임자들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의미 있는 말을 덧붙였다.
“적폐 중 가장 큰 적폐는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적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적폐를 젖혀두고 반역자가 애국자를 사냥하는 것을 적폐 청산이라면서 도와준 검사, 판사는 없는지 모르겠네요. 간첩을 골키퍼로 세워놓고는 축구를 할 수 없잖아요?”
검찰총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병서, 김정은을 좌경맹동주의자로 규정 몰아내다
백령도 도발을 명령하였던 김정은은 중국이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무력 개입을 예고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서울 등 대도시에 중국 국적자가 100만 명, 미국 국적자가 20만 명, 일본 국적자가 6만 명이나 체류 중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핵사용을 위협한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백령도 점령 작전을 기획한 부서에선 한국에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고려 대상에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핵사용 위협이 바로 중국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김정은은 처음으로 무력감(無力感)에 휩싸였다.
압록강을 넘어 진격할 태세를 갖춘 중국군에 대응하기 위하여는 휴전선에 배치된 70만 병력 중 30만 명을 빼내어 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만큼 서울에 대한 장사포 타격 능력도 약해진다. 김정은은 이제 문명세계가 자신을 포위망에 가두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허수아비들을 데리고 전쟁놀이를 해왔음도 알게 된다. 전쟁은 군인이 일으키는 경우보다 전쟁을 모르는 독재자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다. 전쟁을 정말 두려워하는 이는 군인이다.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전쟁이 났을 때 피해를 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지휘부도 그런 점에선 다른 점이 없었다.
중국군이 압록강 도하(渡河) 준비를 마친 날 저녁 북한중앙방송은 북한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이름으로 ‘중대 보도’를 내어놓았다. 아나운서는 군복을 입은 남자였다. 발표 요지는 이러하였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긴급 회의를 열고, 조국을 위기에 빠트린 작금의 사태에 책임을 물어 김정은을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기고 결의하였다. 백령도 작전은 김정은이 정치국의 동의 없이 혼자서 결정한 좌경맹동주의적 과오였다. 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수령이 선포하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조선노동당 정치국은 조선인민군이 백령도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으며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약속한다.”
한미연합사는 백령도에서 북한군이 철수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세계 언론은 김정은의 생사(生死)에 대하여 추측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소식통을 인용하는 글이 많았는데 대체로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주동한 궁정 쿠데타로 그림을 그렸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흐루시초프가 비밀경찰 두목 베리아를 제거할 때처럼 황병서가 직접 권총을 들이대어 김정은을 체포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며칠이 지나도 김정은의 생사(生死) 여부와 행방에 대하여는 확인된 정보가 잡히지 않았다.
쿠바 미사일 사건 이후 처음 전개된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세계 사람들이 안도하는 가운데 주식 시장은 과열 조짐을 보였다. 바쁜 곳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였다. 북핵을 도운 적폐 세력 수사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의 수사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사건의 명칭에 ‘적폐’라는 말을 넣을 것을 지시하였다. 대통령은, 수사가 일단락 될 때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뜻도 분명히 하였다.
북한군이 백령도에서 철수한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긴급 전화 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새로운 6자 회담을 제안하였다. 공동 발표문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양국 정상(頂上)은 한반도의 미래가 통일되고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이기를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이란 말을 넣고 싶었으나 시진핑 주석이 반대하였다. ‘자유롭고’라는 말을 받아주었으니 ‘강력하고’는 빼자는 것이었다. 통일 한국의 핵무장을 경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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