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정체가 불분명하고 이해타산이 남달리 빠른 권모술수 가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어느 누구와도 친교를 맺었다. 정치인은 무릇 다 그렇다 할지라도 김대중의 기만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번뜩였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공산주의도 될 수 있고, 친일파도 될 수 있고, 반미파도 될 수 있었다. 김영삼은 그를 두고 “숨 쉬는 것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고 평할 정도로 그의 색깔은 다채로웠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1998년 11월 28일 국민에게
충분한 설명도 없이 신 한일어업협정을 만들었다. 국회에서도 제대로 된 토의조차 하지 않고 1999년 1월 6일 ‘새 천년 민주당’은 날치기로
1월 22일부로 협정을 즉각 발효하였다. 일본과 졸속 협약을 맺은 후 날치기 통과로 하루아침에 동해 바다에 새로 그은 ‘배타적
경제수역’(EEZ)은 독도가 한일공동 관리수역으로 들어감으로 해서 독도 어장을 같이 쓰게 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독도는 대한민국과 일본 공동의 영해로서
이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독도를 한국 EEZ안에 넣지 못하며 한, 일 공동수역인 ‘중간수역’, ‘잠정수역’ 안에 넣어 한국의
배타적 독도영유권을 훼손한 것이다. 이것은 김영삼 정권 시절부터 추진해 온 것으로 오늘날 일본에겐 더 없이 좋은 빌미로 작용하여 영유권 주장의
소리를 드높일 수 있는 탄탄한 발판을 만들어 주는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북한 정권에게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받았던 공작금에
대한 협박 편지를 받고 돈 다발을 들고 대한민국 최초로 동토의 땅, 북한을 방문하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켜 대북 포용 햇볕정책과 노벨 평화상이란
두 마리 토끼를 포획하는 대단위 기획을 멋들어지게 성공시켰으니 국고로 도랑치고 가재를 잡은 셈이다. 집권에 배고팠던 야당 시절을 잊고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는 정치꾼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국가와 국민은 한낱 정치적 도구일 뿐인 김대중에 비한다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은 하급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일합방에 기인한 이완용은 수준 낮은 매국노에 불과할 것이다. 그 많은 소떼와
쌀가마니 더미를 정작 북주민은 알지도 못했고 구경도 못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며 이보다 더한 북조선의 영웅이 어디 있겠나? 국민이
알고 있는 공식 송금은 1조5천억이지만 미국의 정보기관을 통해 비공식 송금도 드러나 국민을 분노케 하였다.
그가 눈물로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으로 떠났다가
1995년 7월, 2년 반 만에 낯 간지럽게 은퇴를 번복하고 대선을 치룬 이유가 무엇일까? 가신이 불쌍해서 인가? 전라도민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인가? 대통령의 꿈을 도저히 버리지 못해서인가? 북한의 편지를 받고 빚을 갚기 위해서인가? 그의 정치 인생에서 대기업, 미국, 일본,
북한, 호남은 한낱 정치적 스폰서 역할을 하는 기구에 불과했고 그 자신은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색깔로 바뀌었다.
북한에는 대남공작을 주도하는 총사령부 3호 청사 지하에
‘영웅관’이 있다. 그 ‘영웅관’에는 김정일의 서명(북한 말로 수표)을 받아야만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통전부에 근무하는 증언자가 임동욱
통일연구소 부부장의 안내로 들어가 영웅 1호 성시백 부터 몇 개의 사진을 지나치자 김대중의 사진이 걸려있어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자 안내자가
"우리 사람이야"라고 하였다 한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유동열 치안정책연구소선임연구관이 증언하였다. 김대중은 명실공히 북조선의 영웅이자 호남의
신이고 좌익의 대부다.
김대중은 성품상 북한주민의 인권에 가슴 아파 할 사람도
아니고 통일에 영혼을 걸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정치적인 민족주의자였을 뿐이다. 그런 김대중은 철저히 호남국민을 이용하였다. 그가 간 후
호남인과 좌익은 김대중 정신으로 5.18을 거룩한 성전으로 받들고 지역주의자, 반정부주의자, 연방제주의자가 되어 시대에 맞지 않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애국가보다 성스럽게 부르고 있으나 정작 김대중은 5.18묘역에 없다. 그 하나만 보아도 호남인은 그를 영웅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18을 종용한 김대중의 이어지는
반역행위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각 첩보기관의 대공요원 등을 4000여명이나 해고하여 국가의 정보활동을 마비시킨 경악을 금치 못할 반역행위이다.
그런데 곧 이어 북한에선 어찌 알고 남한 정권들이 오랜 세월 북한 요직에 심어논 소중한 인적 자산인 휴민트(인적 정보요원) 250여명을 대숙청하는 참변이 발생한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런 사실들을 꿈에도 알지
못했었다. 그 이후 국가정보원은 김대중의 개인 친위대였고 붉은 여우 이종찬, 임동원이 부장이 되어 충성을 다 하였던 것이다.
대통령의 꿈을 가진 또 한사람인 김영삼은 비자금 논란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일사부재리 원칙을 파괴하고 헌법도 고쳐가며 노태우에 배신의 칼을 빼들고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5.18광주사태’를
‘5.18민주화운동’으로 바꿔치기함으로서 지금 좌익은 그 5.18묘역을 성지로 받들어 결집하고 북정권과 함께 참배한다. 북한이 왜 굳이 거기로
가서 참배를 하는 것일까? 참으로 의아하고 의심스런 일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북한과 친북과 종북 좌익이 뒤섞여 장악하게
되었다.
김영삼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은 정치 모리배로서
1994년 클린턴 시절 다 짜놓은 미국의 영변 핵 시설 폭격 계획을 사생결단 막고 나섰다. 그 때 북한은 전의를 상실한 공황상태로서 전면전을
치를 연료조차 바닥이 난 북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기에 고위층은 우왕좌왕 망명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분단 이 후 최대의 통일 기회였다고 그
당시 북정권의 고위층에 있었던 탈북 인사인 강명도교수가 채널 A에 출연해 비통한 마음으로 폭로하였다.
그렇게 어려운 북한에게 햇볕의 은총을 내려 준 김대중이 어찌
영웅이 아니겠는가마는 그보다 앞 서 북한의 멸망을 극적인 순간에 막고 나선 김영삼의 공로야말로 김대중을 능가하는 영웅 행위였다. 그러기에 당연히
영웅관에 김영삼의 사진이 우선 걸려야만 했지만 그의 사진이 없는 것은 미운 털이 박혔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김영삼정권 시절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약속이 예기치 않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되었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당시 분위기 상 미국도 보내는 조문사절은 커녕 전 군에 비상을 내려 안보에만 치중하니 북정권은
도발 의심까지 드는 배신감을 느껴 연일 대남방송으로 김영삼 반역도당의 패륜을 규탄하는 거품을 물었던 것이다.
조국 근대화를 반대하던 김영삼은 1997년 IMF를 터뜨렸고
그 위기가 1995년 은퇴 번복을 한 김대중에겐 호 기회가 되어 기업을 헐값에 떨이 치며 나라를 구했다고 생색을 내었다. 이들의 임기 중에 비리
혐의로 자식들이 구속당하는 부끄러운 일이 발생하였지만 통치기간 동안 연산군처럼, 광해군처럼 폐위도, 귀양도, 단명도 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행운의 사나이들이었다는 사실은 그 만큼 정치를 잘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우리 국민이 어리석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산업화 가동 원심력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도 경제가
돌아가고 있다가 이제 그 힘을 잃어 경제가 주춤거리고 있다. 민주화의 대부들에게서는 탄력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반대하던 두뇌들이 어찌 경제가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배고픈 그 시절에 집권을 위해 빵보다 민주주의를 더 외치던 자들인데 말이다. 그래서
일찍이 박정희는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매서운 통찰력으로 예견한 바가 있었다.
우리 국민의 취약점은 아이큐는 높아도 머리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들의 민주화 공작에 많은 국민들이 진보라는 버러지들이 되어 영혼을 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김영삼과 김대중이 탄생시킨
붉은 악마가 노무현이다. 노무현은 아름다운 좌익주의에 빠져 죽는 날 까지도 괴이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상식에 어긋난 정책을 펼쳤던 철없는
대통령이었다.
이들은 사념(邪念)과 공명심이 우선한 자들로서 언젠가 국민이
정신을 차리는 날이 오게 되면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길이 남을 교활한 지도자로, 반역자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김영삼, 김대중은 우리 한민족에겐 잊지 못할 김씨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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