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4일 화요일

'아가씨'와 '곡성' 진짜 열광할 영화인건 맞나

2016년06월09일 10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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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곡성' 진짜 열광할 영화인건 맞나
<김헌식의 문화 꼬기>물량 공세 마케팅으로 흥행 끌어올리기 언제까지...
▲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가 개봉 6일째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CJ엔터테인먼트

최근에 접한 영화 가운데 사이비 영화 2위는 '곡성'이고, 1위는 '아가씨'였다. 대개 사이비는 어떤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곡성'은 장르 영화 감독의 타이틀을 달아온 나홍진이라는 이름에 대기업에서 기획 제작 배급하는 영화라는 점이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칸이라는 유명 영화제의 이름에다가 해외 유수의 언론 평가가 덧붙여졌다. 이런 권위에 기대는 행태는 영화 '아가씨'에도 반복되었다.

오래전부터 마케팅 팀은 영화의 연출자가 칸에 익숙한 박찬욱 감독이라는 점을 부각하여 왔다. 여기에 해외 언론의 평가도 역시 덧붙여졌다. 더구나 '곡성'도 그러했지만 칸에 초청된 것은 물론 해외 몇 개 국가에서 구매했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스크린을 도배했다. 앞에서 수순을 밟아온 권위를 앞세운 마케팅에 관객들은 역시 무력해졌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볼만한 영화일까. 영화 '곡성'의 경우, 메시지는 간단하다.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의심이라면 도시 인구가 다 악마의 처단을 받았어야 한다. 이런 영화들은 꼭 지역의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한다. 과연 지역이 그렇게 폐쇄적이고 의심과 배신이 난무하는 곳일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지 모른다. 관심도 없다. 특히 도시 공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더욱 그렇다.

서울과 뉴욕 파리 밖에 모르는 한국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역을 그렇게 그린 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냥 제3세계와 같다. 아프리카나 남미, 아랍에 버금가게 그려도 말이다. 도시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관객수야 많아질 수 있다. 실험적인 기법과 혁신적이라고 할 법도 하다. 한국인인데도 서양인같이 더욱 제3세계 보듯 곡성의 배경 공간을 대할 것이다. 서양인과 같이 그냥 공포의 공간일 뿐이다. 당연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 아무리 호평이 나와도 그건 그들의 시각에서 당연한 노릇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영화가 기획 제작되었으니 결과는 아주 호쾌하고도 남는다. 결국 낚시 미끼에 다 걸려든 셈이다.

영화 '아가씨'의 경우, 메시지가 간단하다. 레즈가 해법이라는 것이다. 원인은 가부장제 사회다. 여기에서 여성이 해방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것인데, 그 수단이 레즈비언의 사랑이었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남성들 조차 모두 변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남자가 비록 잘 생기고 매력적이라도 사기꾼에 잡놈에 불과하니 해법은 여성들 스스로 해방을 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모두 범죄자들이었다. 여성을 불법으로 가두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그러한 상황을 향유하는 불법을 저지르는 존재들만이 있으며, 사기꾼들로 등장할 뿐이다. 당연히 여성 주인공들을 범죄에 연루시킨다. 결코 여성은 그러한 남자들의 불법과 범죄에 일말의 원인이나 동기를 제공하지 않으며 여성들은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남성들 사이에서도 매우 예외적이고 실제로 있는 지도 알 수가 없다.

모든 남성들이 범죄자가 아닌데도, 아니 모든 남성들이 변태가 아닌데도 극 중 두 여성은 결국 범죄자와 변태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들이 두 여성에게 한 짓은 악랄하게도 다른 남성들과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들었던 점이다. 그것을 영화는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이 도피를 해서 떠났지만 인생을 영원히 기차 안에서 성관계를 하면 살 수는 없다. 핵심은 성관계가 아닌 데 말이다.

그조차 범죄자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그것도 역시 남자 감독의 시선일 뿐이다. 두 여성은 관념적 기호들일 뿐이다. 더구나 레즈가 가부장적 사회의 해법이라는 식의 영화는 쌓여있다. 단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은  교차적 구성을 했다고 하여 극찬의 대상이 되고, 극장 스크린을 이렇게 지배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지 의문이다. 포인트 쌓인다고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 듯이 이런 영화를 봐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휴일이어도 어디 놀러갈 여유가 되지 않는다. 밀린 잠을 자거나 끝내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 잠깐 시간을 내어 뭔가 피로감을 덜 수 있는 작품을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극장에는 온통 비정상성을 정상으로 우기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극도의 감정적 노동을 강요하는 영화들만 걸려있다. 그것을 대체할 다른 영화들은 아예 선택의 상황에서도 빠져 버린다. 극장에서 사육당하는 관객들이다.

뭔가를 계속 봐야 하는 도시 공간 속에서 시민들은 보고 난 후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합리화에 빠져 버리며, 어느새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충성도 높은 관객 숫자가 되어 버린다.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언론매체가 된다. 숫자에 의미 부여를 알아서 해주니, 마케팅의 정점에 최종 마침표를 찍는다. 다시금 영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치달아 제작되고, 시민들은 영화에서 점점 소외된다.

글/김헌식 동아방송예술대 교수[김헌식 동아방송예술대 교수]

출처 :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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