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가 본 '국제시장'-좀 미안한 이야기
영화를 만든 분들에게 우선 감사한다. 미안하기도 했다. 우라 세대의 고생이 강조되었는데 그래도 '안전한 고생'이었다. 나라가 있었고 든든한 父母가 있었다. 그리하여 우라는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 풍요를 즐기기 시작한 첫 세대가 되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으로 간 주인공이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하는 말, "저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근데 참 힘들었습니다"가 이 영화의 절정이다. 카메라가 멀리서 두 개의 방을 비춘다. 흐느끼는 할아버지의 방, 그 옆에서 즐겁게 노는 자식들의 방. 한국 사회의 斷面이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다. 대한극장에서. 영화 주인공 윤덕수(배우 황정민)는 1944, 43년생으로 추정된다. 나는 1945년생, 즉 해방둥이다. 우리 또래의 이야기인 셈이다. 영화를 만든 분들에게 우선 감사한다. 미안하기도 했다. 우리 세대의 고생이 강조되었는데 그래도 '안전한 고생'이었다. 나라가 있었고 든든한 父母가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 풍요를 즐기기 시작한 첫 세대가 되었다.
정말 고생한 세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삼촌 세대이다. 1910, 1920, 30년대생이다. 이 분들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전쟁을 온몸으로 겪고 그 폐허 위에, 피와 눈물과 땀의 금자탑을 세웠다. 말 한 마디로 生死가 오가고 줄을 잘못 선 결과는 평생을 가기도 했다. 이 분들은 고생 끝에 병을 얻거나 短命(단명)하여 老後(노후)도 편하지 못한 편이었다.
'국제시장'은 해방 후 부산 신창동에서 생겼다. 戰時(전시)에 군수물자, 원조물자, 일본 밀수품이 상품으로 나와 그야말로 국제시장이 되었다. 피란민들은 이 시장 덕분에 먹고 살았다. 시장의 위대한 힘이다. 국가기능은 상당 부분 마비되었지만 시장이 살아 움직인 덕분이다.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은 부산 사람들이 피란민들을 집집마다 받아들였다. 집이 수용소가 되었다. 북한이 무너져 난민들이 남한으로 쏟아져 내려올 때 한국인들은 어떻게 할까?
전쟁은 인간 內面(내면)의 두 얼굴,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드러낸다. 戰線(전선)에선 敵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므로 惡鬼(악귀)가 될 수밖에 없다. 후방에선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천사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戰線에서도 천사처럼 행동한 이들이 있다. 바로 흥남철수 작전의 미군과 국군이다.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3개 사단, 한국군 2개 사단 약 10만 명은 거의 같은 수의 민간인들을 철수선에 태우고 거제도로 왔다(그들중 한 사람이 문재인 씨의 아버지라고 한다). 世界戰史에 유례가 없는 인도주의였다.
영화에는 민사처 고문 현봉학 씨가 아몬드 10군단장에게 민간인 구출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도 "만약 미군이 구출해주지 않으면 국군이 이들을 陸路(육로)로 데리고 가겠다"고 압박했다고 한다. 아몬드 장군도 부두로 몰려나온 자유민들의 절박한 얼굴들을 보고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 김백일 장군에게 감사하는 동상을 거제도에 세웠더니 못된 사람들이 흠집을 내고, 경남도까지 철거를 지시하는 소동이 벌어졌던 것은 3년 전이었다(애국자들이 소송을 통해 지켜냈다).
영화에선 민간인들을 싣기 위하여 장비를 버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군은 근 200척의 함선을 동원, 포위한 중공군의 접근을 막는 폭격과 포격을 계속하면서 교두보를 유지, 그 사이에 1만7000대의 차량과 35만 t의 군수물자를 실어 내왔다. 가장 성공적인 철수작전으로 꼽힌다.
이 영화엔 부산 정서가 많이 묻어 있다. 무대도, 사람도, 대화도 부산 식이다. 개방적 서민성이 강한 도시, 그런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자갈치 시장과 국제시장의 活氣다. 이 영화의 특징은 현실과 假想(가상)이 한덩어리가 된 것 같은 實感(실감)이다. 정주영, 앙드레김, 남진, 이만기,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현대사의 소도구로 등장한다. 특히 1983년 KBS가 진행한 이산가족 찾기 방송 장면은 영화 속으로 현실이 들어온 것 같은 迫眞感(박진감)을 보여주었다. 31년 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 가락이 울려퍼지는 여의도를 취재하던 때가 떠오르면서 "31년 뒤엔 내 나이가 100살이 되는데" 하는 농담을 아내에게 했다.
1950년대의 한국처럼 가난하고 자원이 없는 나라는 人力 수출부터 한다. 移民(이민)도 많이 간다(필자 가족도 파라과이로 이민 가는 수속을 밟다가 실패, 다행히 한국에서 살고 있다). 광부, 간호사 이전에 해양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력이 외항선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수출선원'이라 불렀다. '국제시장'에서도 주인공의 꿈은 '선장'이었다. 영화는 서독 탄광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이 坑內(갱내) 폭발 사고를 겪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국내 탄광에 비하여 서독 탄광은 훨씬 안전했다. 당시 한국에서 광부들은 '産業戰士'(輸出戰士 이전)로 불리면서 지하 1000m까지 내려가는 석탄 캐기를 하다가 많이 희생되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순직산업戰士 위령탑 기록에 의하면 태백의 광산에서 순직한 鑛夫(광부)는 2010년까지 4068명이었다. 거의 전부가 석탄광부다. 태백은 전국 석탄 생산량의 약 30%를 점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광부들의 10%가 매년 죽거나 다쳤다. '아빠, 오늘도 안전!'이란 구호가 갱도 입구에 늘 써붙여졌던 시절이다.
독일에서 돈도 벌고 부인도 얻은 주인공 윤덕수는 1974년엔 월남에 돈을 벌러 간다. 여기서 해병대 남진도 만나고 월남 아이를 구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이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해병대 등 한국군 전투 부대는 1973년에 철수하였다.
월남 파병은 한국 현대사의 획기적인 局面(국면)이었다. 2개 사단 延(연) 30만 명이 파견되었고, 약 5000명이 戰死(전사)하였다. 한진·현대 등 운수 건설 회사들이 조직적으로 진출, 국제 공사를 경험하고 힘을 길러 1970년대에 중동 건설 시장으로 도약,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人力 수출에 그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과 회사 차원에서 파고든 한국의 차이는 지금 엄청나다.
1960년대 한국은 두 개의 戰線이 있었다. 북한의 對南(대남)도발에 대응하는 국내전선, 그리고 월남전선. 두 전선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신문 紙面(지면)을 매일 장식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주력, 중화학 공업을 건설, 북한을 눌렀다.
이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유행했던 '맹호는 간다'라는 軍歌(군가)엔 이런 대목이 있다.
"자유통일 위하여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
이 영화엔 애국가가 자주 나온다. 국기 하강식 때는 주인공 부부도 싸움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애국심 투철'이 합격 사유가 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우파적 시각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휴전 발표가 나올 때 한 청년은 삐딱하게 말한다.
"힘 없는 나라에 외국 군대가 들어와 국제전쟁터를 만들었다."
외국군대가 들어온 것은 북한군이 남침해서이고, 국제전쟁터로 만든 범인은 미국이 아니라 나간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김일성이다. 兩非論을 良識인 줄 착각하는 이 청년은 한국 사회를 좌경화시킨 '쓸모 있는 바보' 그룹, 즉 지식인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할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들 사이의 대화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세대간 갈등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아들은 '꼴통' 같은 아버지를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으로 몰고, 아버지는 섭섭해도 참는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손자(손녀?)가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니 아들 딸이 할아버지가 가르쳤다고 면박 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으로 간 주인공이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하는 말, "저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근데 참 힘들었습니다"가 이 영화의 절정이다. 카메라가 멀리서 두 개의 방을 비춘다. 흐느끼는 할아버지의 방, 그 옆에서 즐겁게 노는 자식들의 방. 한국 사회의 斷面이다. 욕심 같았으면 이 장면에서 영화를 끝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越南行을 말리는 아내에게 주인공이 내뱉은 말-"나는 뭐 가고싶어서 가는 줄 아나"도 참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다. 가고싶지 않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가족을 먹여살리고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대의 抗辯(항변) 아닌 고백이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해방둥이 세대는 가난을 이기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은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가난을 이기는 이가 100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이는 한 명도 안된다"고 했다. 이 영화는 가난을 이긴 세대에겐 기억이지만 가난을 모르는 다수 한국인들에겐 '뉴스'일 것이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자식들을 잘 키우고 과거를 아름답게 회고할 수 있게 만든 사람들은 李承晩(이승만) 세대, 朴正熙(박정희) 세대이다. 이 위대한 세대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중화학공업, 대기업, 중산층, 마이 카, 아파트, 민주와 복지 제도를 70년 만에 건설하는 데 그래도 최소한의 人命희생은 있었다.
주인공의 선배 세대는, 가난과 亡國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썩은 강물 같은 세상을 삼켜 바다 같은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 사람들이다. 이 세대의 旗手(기수) 박정희가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 "난 괜찮아"라고 내뱉었던 것은,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해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시신)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세대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온갖 인간적 비극을 당하고도 의연히 버티면서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잘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희생한 이 세대의 치명적 실수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지 않아 자녀들이 풍요를 누리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이 근사한 나라가 공짜로 생긴 존재로 알도록 방치한 점이다. 투표권을 가진 성인 중 15%, 약 500만 명이 남침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난 괜찮아' 세대가 만든 평화와 번영이 국민정신을 망가뜨리는 毒(독)이 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국제시장', 그 제작진에게 70이 된 해방둥이가 감사를 드린다. 영화를 우파적으로 만들어달라는 뜻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변명도 미화도 왜곡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현대사는 모두가 좋은 영화 소재이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국제시장이 생기는 날을 기다린다.
정말 고생한 세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삼촌 세대이다. 1910, 1920, 30년대생이다. 이 분들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전쟁을 온몸으로 겪고 그 폐허 위에, 피와 눈물과 땀의 금자탑을 세웠다. 말 한 마디로 生死가 오가고 줄을 잘못 선 결과는 평생을 가기도 했다. 이 분들은 고생 끝에 병을 얻거나 短命(단명)하여 老後(노후)도 편하지 못한 편이었다.
'국제시장'은 해방 후 부산 신창동에서 생겼다. 戰時(전시)에 군수물자, 원조물자, 일본 밀수품이 상품으로 나와 그야말로 국제시장이 되었다. 피란민들은 이 시장 덕분에 먹고 살았다. 시장의 위대한 힘이다. 국가기능은 상당 부분 마비되었지만 시장이 살아 움직인 덕분이다.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은 부산 사람들이 피란민들을 집집마다 받아들였다. 집이 수용소가 되었다. 북한이 무너져 난민들이 남한으로 쏟아져 내려올 때 한국인들은 어떻게 할까?
전쟁은 인간 內面(내면)의 두 얼굴,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드러낸다. 戰線(전선)에선 敵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므로 惡鬼(악귀)가 될 수밖에 없다. 후방에선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천사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戰線에서도 천사처럼 행동한 이들이 있다. 바로 흥남철수 작전의 미군과 국군이다.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3개 사단, 한국군 2개 사단 약 10만 명은 거의 같은 수의 민간인들을 철수선에 태우고 거제도로 왔다(그들중 한 사람이 문재인 씨의 아버지라고 한다). 世界戰史에 유례가 없는 인도주의였다.
영화에는 민사처 고문 현봉학 씨가 아몬드 10군단장에게 민간인 구출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도 "만약 미군이 구출해주지 않으면 국군이 이들을 陸路(육로)로 데리고 가겠다"고 압박했다고 한다. 아몬드 장군도 부두로 몰려나온 자유민들의 절박한 얼굴들을 보고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 김백일 장군에게 감사하는 동상을 거제도에 세웠더니 못된 사람들이 흠집을 내고, 경남도까지 철거를 지시하는 소동이 벌어졌던 것은 3년 전이었다(애국자들이 소송을 통해 지켜냈다).
영화에선 민간인들을 싣기 위하여 장비를 버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군은 근 200척의 함선을 동원, 포위한 중공군의 접근을 막는 폭격과 포격을 계속하면서 교두보를 유지, 그 사이에 1만7000대의 차량과 35만 t의 군수물자를 실어 내왔다. 가장 성공적인 철수작전으로 꼽힌다.
이 영화엔 부산 정서가 많이 묻어 있다. 무대도, 사람도, 대화도 부산 식이다. 개방적 서민성이 강한 도시, 그런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자갈치 시장과 국제시장의 活氣다. 이 영화의 특징은 현실과 假想(가상)이 한덩어리가 된 것 같은 實感(실감)이다. 정주영, 앙드레김, 남진, 이만기,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현대사의 소도구로 등장한다. 특히 1983년 KBS가 진행한 이산가족 찾기 방송 장면은 영화 속으로 현실이 들어온 것 같은 迫眞感(박진감)을 보여주었다. 31년 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 가락이 울려퍼지는 여의도를 취재하던 때가 떠오르면서 "31년 뒤엔 내 나이가 100살이 되는데" 하는 농담을 아내에게 했다.
1950년대의 한국처럼 가난하고 자원이 없는 나라는 人力 수출부터 한다. 移民(이민)도 많이 간다(필자 가족도 파라과이로 이민 가는 수속을 밟다가 실패, 다행히 한국에서 살고 있다). 광부, 간호사 이전에 해양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력이 외항선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수출선원'이라 불렀다. '국제시장'에서도 주인공의 꿈은 '선장'이었다. 영화는 서독 탄광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이 坑內(갱내) 폭발 사고를 겪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국내 탄광에 비하여 서독 탄광은 훨씬 안전했다. 당시 한국에서 광부들은 '産業戰士'(輸出戰士 이전)로 불리면서 지하 1000m까지 내려가는 석탄 캐기를 하다가 많이 희생되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순직산업戰士 위령탑 기록에 의하면 태백의 광산에서 순직한 鑛夫(광부)는 2010년까지 4068명이었다. 거의 전부가 석탄광부다. 태백은 전국 석탄 생산량의 약 30%를 점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광부들의 10%가 매년 죽거나 다쳤다. '아빠, 오늘도 안전!'이란 구호가 갱도 입구에 늘 써붙여졌던 시절이다.
독일에서 돈도 벌고 부인도 얻은 주인공 윤덕수는 1974년엔 월남에 돈을 벌러 간다. 여기서 해병대 남진도 만나고 월남 아이를 구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이 장면은 사실과 다르다. 해병대 등 한국군 전투 부대는 1973년에 철수하였다.
월남 파병은 한국 현대사의 획기적인 局面(국면)이었다. 2개 사단 延(연) 30만 명이 파견되었고, 약 5000명이 戰死(전사)하였다. 한진·현대 등 운수 건설 회사들이 조직적으로 진출, 국제 공사를 경험하고 힘을 길러 1970년대에 중동 건설 시장으로 도약,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人力 수출에 그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과 회사 차원에서 파고든 한국의 차이는 지금 엄청나다.
1960년대 한국은 두 개의 戰線이 있었다. 북한의 對南(대남)도발에 대응하는 국내전선, 그리고 월남전선. 두 전선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신문 紙面(지면)을 매일 장식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주력, 중화학 공업을 건설, 북한을 눌렀다.
이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유행했던 '맹호는 간다'라는 軍歌(군가)엔 이런 대목이 있다.
"자유통일 위하여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
이 영화엔 애국가가 자주 나온다. 국기 하강식 때는 주인공 부부도 싸움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애국심 투철'이 합격 사유가 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우파적 시각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휴전 발표가 나올 때 한 청년은 삐딱하게 말한다.
"힘 없는 나라에 외국 군대가 들어와 국제전쟁터를 만들었다."
외국군대가 들어온 것은 북한군이 남침해서이고, 국제전쟁터로 만든 범인은 미국이 아니라 나간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김일성이다. 兩非論을 良識인 줄 착각하는 이 청년은 한국 사회를 좌경화시킨 '쓸모 있는 바보' 그룹, 즉 지식인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할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들 사이의 대화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세대간 갈등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아들은 '꼴통' 같은 아버지를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으로 몰고, 아버지는 섭섭해도 참는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손자(손녀?)가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니 아들 딸이 할아버지가 가르쳤다고 면박 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으로 간 주인공이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하는 말, "저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근데 참 힘들었습니다"가 이 영화의 절정이다. 카메라가 멀리서 두 개의 방을 비춘다. 흐느끼는 할아버지의 방, 그 옆에서 즐겁게 노는 자식들의 방. 한국 사회의 斷面이다. 욕심 같았으면 이 장면에서 영화를 끝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越南行을 말리는 아내에게 주인공이 내뱉은 말-"나는 뭐 가고싶어서 가는 줄 아나"도 참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다. 가고싶지 않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가족을 먹여살리고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대의 抗辯(항변) 아닌 고백이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해방둥이 세대는 가난을 이기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은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가난을 이기는 이가 100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이는 한 명도 안된다"고 했다. 이 영화는 가난을 이긴 세대에겐 기억이지만 가난을 모르는 다수 한국인들에겐 '뉴스'일 것이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자식들을 잘 키우고 과거를 아름답게 회고할 수 있게 만든 사람들은 李承晩(이승만) 세대, 朴正熙(박정희) 세대이다. 이 위대한 세대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중화학공업, 대기업, 중산층, 마이 카, 아파트, 민주와 복지 제도를 70년 만에 건설하는 데 그래도 최소한의 人命희생은 있었다.
주인공의 선배 세대는, 가난과 亡國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뭉쳐 두었던 恨(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썩은 강물 같은 세상을 삼켜 바다 같은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 사람들이다. 이 세대의 旗手(기수) 박정희가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 "난 괜찮아"라고 내뱉었던 것은,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해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屍身(시신)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세대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온갖 인간적 비극을 당하고도 의연히 버티면서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잘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희생한 이 세대의 치명적 실수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지 않아 자녀들이 풍요를 누리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이 근사한 나라가 공짜로 생긴 존재로 알도록 방치한 점이다. 투표권을 가진 성인 중 15%, 약 500만 명이 남침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난 괜찮아' 세대가 만든 평화와 번영이 국민정신을 망가뜨리는 毒(독)이 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국제시장', 그 제작진에게 70이 된 해방둥이가 감사를 드린다. 영화를 우파적으로 만들어달라는 뜻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변명도 미화도 왜곡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현대사는 모두가 좋은 영화 소재이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국제시장이 생기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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