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6일 금요일

[심층취재] 그 순간 이준석 선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심층취재] 그 순간 이준석 선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세월호의 선장·항해사·조타수를 6시간 인터뷰한 강정민 변호사 인터뷰: "두번째 5도를 틀었을 때 기우뚱하여 키를 반대로 돌린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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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변호인朴正熙 전기(全13권)趙甲濟의 現代史이야기(全14권)
배는 절벽으로 변했고, 선장은 '탈출대기명령'의 이행을 확인하지 않아 '생존의 기회'를 놓쳤다. 기울기와의 싸움에서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졌다.

*선장: '지갑과 전화기를 놓고 나왔다. 지폐 말린 적 없다.'
*박한결 3항사: '5도씩 두 번 틀도록 지시'
*조준기 조타수: '두번째 5도를 틀었을 때 기우뚱하여 키를 반대로 돌린 게...'
*강정민 변호사: '그들이 악마는 아니다. 한국을 좋게 바꾼 5大 사건의 하나로 만들어야.'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金泌材 (조갑제닷컴 기자)



암초가 아닌 화물이 犯人
세월호가 침몰한 지난 4월16일 대부분의 언론은 '꽝' 소리가 났다는 증언을 근거로 암초와 충돌한 것 같다는 보도를 했다. 그날 밤 나(조갑제)는 다년간의 사고취재 경험과 컨테이너가 탈락하였다는 점 등에 근거, '화물적재 문제에 의한 침몰'일 것이라고 조갑제닷컴(CHOGABJE.COM)에 썼다. 암초 충돌이면 선장 등 항해 담당자들 책임이고, 화물 적재 문제라면 청해진해운의 책임이 더 커진다. 17일부터는 急변침이 사고 원인이라는 보도가 主流(주류)를 이뤘다. 나는 <조용한 바다에서 急변침만으로 배가 전복된다면 海運은 성립할 수 없다>고 썼다. 선장들이 전화를 걸어 왔다. 나의 분석에 대체로 동의한다면서 연안해운의 문제들을 털어놓았다. 선장들은 또 '배가 급하게 기우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빼고 생각하면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태평양에서 내가 몰던 배가 풍랑을 만나 30도 기울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기울 때는 船體(선체)가 海面(해면)에 닿는 느낌이었고 船內(선내) 이동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사고 사흘 뒤 청해진해운은 언론 브리핑을 했다. 김재범 기획관리부장은 화물 결박이 잘 되지 않아 사고를 키운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 '자동차는 화물칸 바닥에 고리를 통해 고정하고, 컨테이너도 줄을 이용해 고정한다. 船首(선수) 갑판에 있는 컨테이너는 네 귀퉁이에 암수가 맞물리는 고정 장치가 있어 자동으로 고정 된다'고 했다. 화물 過積(과적) 때문에 사고가 커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도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수사결과 이 해명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檢警(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청해진해운 제주지역본부 화물영업담당 직원 李모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고 직후 세월호의 적재 화물 무게 기록을 줄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李씨는 세월호 안에 있던 선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사고 원인이 화물 적재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인천 본사에 있는 물류팀장 김모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상황이 심각해지는데 화물량을 점검해야 하는 것 아니냐. 적재량을 줄이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고 수사본부는 설명했다.

金씨 역시 침몰중인 세월호 안의 선원과 통화해 사고 사실을 認知(인지)한 상태였다고 한다. 金씨는 李씨로부터 전화를 받고 '안 그래도 화물을 실은 업체에 (얼마나 짐을 실었나) 확인해보라고 했다'고 말을 한 뒤 끊고,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화물량을 조정했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李씨는 김씨와 통화 후 화물 적재량이 180여톤 가량 줄어들게 재입력된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수사본부에서 밝혔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檢警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로 세월호가 화물과 차량을 제대로 묶지 않았음이 밝혀졌다고 보도하였다. 과적된 화물이 固縛(고박)까지 제대로 되지 않아 배가 기울자 화물들이 왼쪽으로 몰려 쓰러지면서 침몰을 가속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1등 항해사 강모씨 등은 조난 신고(오전 8시 55분) 직후인 오전 9시1분부터 40분까지 일곱 차례 본사와 통화를 했다고도 한다.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결정적 시간대에 정신적 집중이 되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선장과 인터뷰한 변호사

기사본문 이미지
강정민 변호사(사진촬영: 조갑제닷컴)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선장 이준석 씨 등 승무원 15명은 구속되어 있어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선장뿐 아니라 항해를 지휘하였던 3등 항해사, 키를 잡았던 조타수를, 사고 발생 5일 후인 지난 4월21일에 6시간 동안 인터뷰한 사람을 찾았다.

강정민(법무법인 영진) 변호사이다. 강 변호사는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선임한 변호사는 아니다. 그는 <조갑제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사고 관련자들을 찾아가 만난 이유에 대하여 “사고원인이 궁금해서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천안함 때처럼 이번에도 원인을 두고 國論(국론)이 양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고, 사건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서 찾아가 얘기를 들어본 것이다.”

강 변호사는 선장(船長) 등을 만나고 난 직후 정리한 글을 조갑제닷컴에 보내주었다. 우선 그 글을 요약해서 싣는다. 침몰 사고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장의 설명을 듣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이다.
船長의 상황 설명
<언제까지 수사기관의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과연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가서 만나보자. 만나서 물어보자. 이에 접견을 신청하였다. 접견은 당시 항해를 지휘하고 있던 3등 항해사 박한결, 조타수 조준기, 선장 이준석 순으로 진행되었다. 궁금한 내용이 해소될 때까지 문답을 이어가다 보니 6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접견을 통해 확인된 사실 중에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피의자들의 방어활동 및 수사기관의 수사 활동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① 잠수함이나 우럭 배 같이 운항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일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② 135도에서 145도로 변침(變針)하는 지점까지는 순조로운 항해가 계속되고 있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까다로운 맹골수로(水路)를 거의 벗어나 視程(시정)이 트이고 확보되는 지점에 도착하였고 이제 3시간 정도만 전진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놓은 선장은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가지러 선장실로 갔다. 10도 변침은 항해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③ 10도 변침(變針)지점에서 3등 항해사 박한결(여성)은 평소 지도받은 대로 5도씩 나누어 2단계 변침을 진행하였다. 1단계 5도 변침은 이상 無, 이어 2단계 5도 변침을 지시하였고 조타수 조준기가 키를 돌렸다. 그런데, 배가 기우뚱하는 느낌이 있었다. 이상을 느낀 조타수가 반대 방향으로 15도 정도 키를 회전시켰다. 그 순간이었다. 배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돌면서 배가 좌측으로 기울었다. 원심력 때문이었다. 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느낌상 30도 정도 기운 듯했다.

④ 5층 선수(船首)에 있던 선장과 항해사들 및 조타수들이 조타실로 급히 뛰어왔다. 선장은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트렁크 팬티 차림이었고, 오다가, 기울어지는 복도에 미끄러져 엉덩이와 갈비뼈를 부딪쳤으며, 엉금엉금 기어서 조타실로 들어왔다. 조타실에 들어온 선장은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상황을 파악하며 1등 항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구조요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배는 좌측으로 기울어진 상태. 조타실에 있는 두 개의 교신기 중 오른쪽에 있는 것은 경사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왼쪽에 있는 교신기로 구조를 요청했다. 그 시각이 8시55분. 오른쪽 교신기는 진도 VTS에, 왼쪽 교신기는 제주 VTS에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었다.

⑤ 구조요청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선장은 (배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힐링 탱크(Heeling Tank‧탱크에 물을 넣어 배의 균형을 잡는다)를 작동시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선장은 기관장에게 엔진을 정지시키라고 명령했다. 엔진이 계속 움직일 경우 배가 뱅뱅 돌게 되어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기관장은 아침 7시경 조타실에 올라와 그날 일정 등을 이야기하느라 사고 당시 조타실에 있었다. 기관장은 즉시 기관실에 연락하여 엔진을 정지시켰고 기관실 선원들에게 갑판으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기관실은 배의 밑바닥에 있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야 한다. 선장은 승객들에게 안내방송을 하라고 지시했다. 우왕좌왕하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라이프 재킷을 착용하고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전원(電源)이 불안정하고 배가 기우뚱한 상태라 방송이 잘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타실과 객실(客室)이 구조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통로가 기울어져 있어 가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객실로 가기 위해서는 복도를 거쳐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⑥ 船長은 진도 VTS와 교신이 되고 나서는 구조선 도착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물살이 세고 수온(水溫)이 낮아 구조선들이 도착하기 전에 물에 뛰어 들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구조선이 시야(視野)에 들어올 때까지 退船(퇴선)명령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⑦ 드디어 구조선들이 視野(시야)에 들어 왔고 선장은 퇴선명령을 내렸다. 조타실에 있던 선원들도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부상을 당한 선장은 혼자 힘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누군가 창문 햇볕 가리개(블라인더)를 잡고 내려오라고 해서 그것을 늘어뜨려 잡고 내려갔다.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다. 내려와 보니 저쪽에서 구조대와 어선들이 승객들의 탈출을 돕고 있었다. 거동(擧動)이 불편한 선장과, 객실 쪽과 떨어져 있는 선원들이 구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어려웠고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오히려 구조활동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져 선장과 선원들은 따라 오르라는 구조대원들의 말에 구조선에 올라탔다고 했다.

⑧ 구조선이 팽목항에 도착했다. 팬티 바람에 부상을 입은 선장은 우선 담요로 아랫도리를 둘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핸드폰과 지갑은 선장실에 두고 나온 상태였다. 그는 돈을 말렸다는 말이 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한결과 조준기는 체육관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승객들이 탈출하지 못한 채 배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팽목항에 도착할 때까지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전까지의 명료한 기억에 반해 사고와 그 후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반면 이준석 선장이나 조준기 조타수는 사고 이후 상황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 가지 선택
강정민 변호사를 만나 기고(寄稿)한 내용과 관련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다른 승객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준석 선장의 활동을 제약한 것은 세월호가 갑자기 30도 이상 기울어 선내(船內) 이동이 어려워졌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구조선이 온 상황에서 선장과 선원들에게 세 가지 초이스(choice)가 있었을 거 같다. 첫 번째는 구조선을 안타고 저쪽 구조작업에 필요한 공간으로 이동, 거기서 구조작업을 지휘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가 불가능하다면 어찌됐든 '내가 책임자이니 배에 남아 상황을 보고 최후의 순간에 탈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냥) 구조선에 타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하여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자신들이 나왔을 때 건너편, 여객 쪽으로 건너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배가 상당히 기울어져서 걸어가기도 힘들고 배의 구조 때문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구조 활동에 자신들이 동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선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탈출대기명령은 왜 전달되지 않았나?
강정민 변호사는 이준석 선장이 취한 조치를 이렇게 재구성했다.

'사고가 나고 선장이 조타실에 와서 취한 조치가 순서대로 보면 첫 번째가 구조요청이었다. 나중에 복원된 AIS(자동航跡식별장치) 자료를 보니까 8시48분, 49분경에 사고가 났다. 선장이 자기 방에서 조타실로 뛰어와 상황을 파악한 후 구조 요청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8시55분이었다. 두 번째 한 게 복원 시도였다. ‘힐링 탱크를 작동시켜라’고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세 번째가 탈출 대기명령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구조대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진도 VTS와 교신한 기록을 읽으면 구조대가 어디 있느냐는 얘기가 계속 나온다. 9시30분경에 헬기가 도착하고, 5분 뒤에 구조선이 도착 예정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9시38분 이후에는 조타실과의 교신이 끊겼다. 이후 선장과 선원들이 배에서 나온 것이다. 40~50분 정도의 시간대에 이뤄진 행동이었다.'

세월호 침몰에서 삶과 죽음을 가른 것은, 배가 기울자 선내(船內) 방송이 “움직이지 말고 현위치에 그대로 있어라”고 한 점이었다. 이준석 선장은 이에 관하여 강정민 변호사에게 ‘라이프 재킷을 착용하고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도록 1등 항해사에게 지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명령이 승객들에게 전달됐는지의 여부는 규명이 되어야 할 부분이다. 선장 접견 전에 들었던 내용은 계속 안내방송이 나오면서 '객실에 그대로 있어라'였다. 그런데 선장은 라이프 재킷을 착용하고 탈출을 위해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1등 항해사에게 했고 1등 항해사가 방송을 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명령이 승객들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인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객실에 있어라'는 방송은, 사무장(구조되지 못함)이 한 것 같고, 조타실에서 구체적 명령이 안 내려오니까 자기 판단 하에 한 게 아닌가 싶다. 탈출대기 명령은 9시 좀 지나서 내렸지 않나 싶다. 1항사가 방송을 했는지 방송이 승객들에게 들렸는지 안 들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선장 본인은 명령을 내렸고 1항사가 했겠거니 생각한 듯 하다.'

한 고참선장 출신 導船士(도선사)는, '퇴선대기명령을 받은 선원들이야 별도 설명을 안 해도 탈출이 가능한 갑판으로 올라오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일반 승객에겐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선장이 명령만 내리고 그 명령이 전달되는지, 집행되는지를 확인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실수였다'고 평했다.

傾斜 지옥
세월호 침몰 상황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배가 급히 기운 다음에 복원력을 상실, 매우 빠른 속도로 뒤집히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타이타닉 침몰과 다르다. 타이타닉 호는 빙산에 뱃전이 긁힌 뒤 서서히 침수, 가라앉았기에 구명정을 내리고 사람들이 옮겨 탈 여유가 있었다. 세월호는 순식간에 30도 이상 기울더니 점점 경사 각도가 심해져 1시간 반 만에 완전히 전복되었다. 船內에서는 상하 좌우(上下 左右)의 이동이 어려워지다가 곧 불가능하게 된다. 왼쪽으로 30도, 45도, 60도, 90도, 120도, 180도로 뒤집어지는 과정 속에서 승객과 선원 및 구조대원들의 행동은 결정적으로 제약되었다. 조준기 조타수는 강정민 변호사에게 '(승객이 갇힌) 船室(선실)로 가려면 복도와 계단을 지나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경사가 심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 등반 전문가는 '배가 60도 이상 기울고, 더구나 잡을 게 없다면 암벽 등반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세월호와 진도 VTS(Vessel Traffic System)의 交信(교신)에서도 1등 항해사는 기울기를 걱정한다. 그는, 9시10분 “너무 기울어져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2분 뒤 진도 VTS가 “지금 승선원들은 라이프 래프트(Life Raft) 및 구조보트에 타고 있냐”고 묻자 “아직 못 타고 있다. 지금 배가 기울어 움직일 수가 없다”고 답했다. 9시14분에는 “지금 배가 많이 기울어 승객들의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3분 뒤에는 “지금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져 사람이 左右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며, 선원도 라이프 재킷(구명조끼)을 입고 대기하라고 했는데. 사실 입었는지 확인도 불가능한 상태이고, 선원들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18분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진도VTS: '세월호 현재 물이 얼마나 차 있습니까?'
*세월호: '그것도 확인이 안되고 있습니다. 지금 데크(갑판)에 컨테이너 몇 개가 빠져 나간 거는 船首(선수)에서 확인이 되는데 이동이 안 되어서 브릿지(선교. 조타실)에서 좌우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여서 벽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9시23분 진도 VTS가 “경비정 도착 15분 전이다. 방송 해 승객들에게 구명 동의를 착용토록 하라”고 지시했지만 세월호는 “방송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답했다. 진도 VTS가 “방송이 안되더라도 최대한 나가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 및 두껍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조치 바란다”고 하자 세월호는 “본선이 승객들을 탈출시키면 구조가 바로 되겠느냐”고 물었다. 진도 VTS는 “라이프링(구명튜브)이라도 착용시키고 띄우라. 빨리”라고 지시했다. 세월호는 오전 9시37분 마지막 교신에서 “침수 상태 확인 불가하고, 상선들은 50m 접근해 있고 좌현으로 탈출할 사람만 탈출 시도하고 있으나 좌현으로 이동하기도 쉽지 않다. 배가 한 60도 정도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다'고 했다.

세월호 1항사는 교신의 대부분을 배가 기울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하소연으로 채웠다.
절벽으로 변한 배
증언과 동영상을 분석해보면, 세월호 船體는, 9시쯤 왼쪽으로 45도, 9시17분엔 약50도, 9시38분에 약60도나 기울었고, 10시13분엔 약80도, 15분엔 약90도, 25분엔 180도로 완전히 뒤집혔다. 기우는 데 가속도가 붙었다는 얘기다.

생존자 김성묵씨는 지난 4월17일 CBS 라디오와 한 인터뷰에서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스마트폰으로 각도를 쟀는데 45도였다고 했다. 이어서 위험하니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계속 나왔다.

'처음에는 (방송을 듣고) 거진 다 가만히 있었고 나도 가만히 있다가 아니다 싶어 (오른쪽) 4층 난간 쪽으로 나왔다. 홀에 있던 아이들이 잡을 데도 없고 벌써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 바닥을 붙잡고 올라와야 되는데 거기가 미끄러져서 잡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소화기 호스를 이용해서 끌어당기는데 몇 명 못 구했는데 90도 가량 기울어지다 보니까 아이들 힘이 부족해서인지 잡고 있지 못했다.'

왼쪽으로 배가 60도 이상 기울면 선실에 있던 이들은 절벽 밑에 놓인 꼴이 된다. 이 절벽은 조금 전까지는 선실 바닥이었는데 맨들맨들하다. 기어오르려 해도 잡을 게 없다. 위(오른쪽 난간)에서 던진 호스를 잡더라도 몸을 의지할 데가 없다.데롱데롱 매달려 있다가 놓으면 바닥으로 떨어진다. 곧 바닷물이 들어왔다. 용감한 시민들이 소방 호스를 던져서 끌어올리기도 했으나 몇 사람 살리지 못했다. 한 시민은 '아래에 있는 학생들은 꼭 우물에 빠진 것 같았다'면서 '고무호스를 던지는 나에게 '아저씨,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승객 안전’이란 절대 개념의 실종
선장이 사고를 알고 조타실로 돌아온 9시 경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대피 대기 명령이었다. '배가 넘어가니 구명 재킷을 입고 오른쪽 난간이나 갑판 쪽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하고 비상벨을 눌렀어야 했다. 선체가 60도로 기운 게 9시37분이니 그때까지의 30~40분간이 탈출의 기회였다. 선장은 이 결정적 시간을 놓쳤다.

엔진을 끄라는 명령을 내리고, 배를 복원시키려는 '힐링 탱크' 작동 시도를 하는 데도 귀중한 몇 분이 흘렀을 것이다. 그는 강정민 변호사에게 '탈출대기명령'을 내렸다고 했으나 이 명령은 船室에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가만히 있어라'는 치명적 내용의 방송만 되풀이 되었다. 이준석 선장은 기울어가는 조타실에서 아픈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할 일이 많았겠지만 자신의 탈출대기명령이 정확하게 전달되는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탈출 가능한 시간대를 놓친 것이다. 그의 언동을 보면, 머리속에 '승객의 안전'이란 개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약했다는 느낌이 든다. 人命(임명)구조를 절대 명제로 설정, 선장은 이 일에 집중하였어야 했다.

세월호에는 선원들이 승객들의 탈출을 안내할 수 있는 방법이, 안내방송, 무전기, 비상벨, 전화기 등 많았다. 合搜部(합수부)에 따르면 조타실엔 선장 등 승무원 8명이 모여 있었지만 이 수단을 어느 것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조타실에 있는 안내방송 설비의 사용법은, 작동(ON)으로 맞추고 4개 버튼(승조원 구역, 기사실 구역, 식당·매점 구역, 全구역) 중 방송을 원하는 구역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하면 된다. 1항사는, 진도해상교통관제센터(VTS)와 한 교신에서는 “방송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방송 수단은 있었지만 거기까지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인지, 의지가 약해서인지는 재판 과정에서 논란이 될 것이다.
海警이 船室에 진입할 수 있었나?
조타실엔 무전기 4대도 있었다. 합수부는 조타실에 있던 선원들이 이 無電機(무전기)를 이용했다면 3층 객실에 있던 사무 승무원들에게 탈출 안내를 지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항해사가 양대홍 사무장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라”고 말한 것 이외에 어떠한 무전 교신도 없었다고 한다. 합수부 관계자는 “조타실에서 한 명이 (구명벌을 투하하기 위해) 발을 하나 뗐는데 미끄러울 것 같아서 발을 뺐다는 진술이 하나 있다”며 “이게 유일한 시도다. 다른 조치는 일체 없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선원들이 기울어가는 조타실에서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였다는 이야기이다.

배가 기울면서 절벽처럼 되어버리자 船內이동은 물론이고 船內통신마저 마비된 것이다. 인간의 의지력과 훈련된 기능으로 기울기의 난관을 극복했어야 했는데 실패하였다. 그 결과는 지휘체제의 붕괴였다. 전쟁이든 사고이든 기습당한 조직의 지휘체제가 무너지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강정민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장의 탈출 대기 명령은 기관실 선원들에게 분명히 전달됐고 조타실 승무원들에게는 肉眼(육안)으로도 확인됐을 것이다. 다만 사무장에게 전달됐느냐의 문제인데, 船內에 있으라는 방송이 나온 것으로 봐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0시 넘어서 퇴선하라는 방송이 나갔는데 이때는 배가 너무 기울어 승객들이 빠져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느낌 상으로는 30도 별 거 아니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구조선이 왔을 때는 船體(선체)가 60~70도 넘어갔을 때인데 스파이더맨이 아니고는 못 올라간다. 海警(해경)도, 1차 구조대가 헬기로 도착한 게 9시30분이고, 이어서 구조선이 왔다. 장비 없이 왔다. 이들은 밖에 나온 사람들 구조에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선내 승객 구조 명령은 구조본부에서 했어야 한다. 계속 교신으로 상황을 파악하면서 2차 구조선을 보낼 때는 필요 장비도 보냈어야 했다.'

언론은, 해경 구조대가 도착 즉시 船室까지 진입하여 갇힌 이들을 구했어야 한다면서 비판한다. 해경이 60도 이상 기울어 사실상 엎어지고 있는 선체를 암벽 등반 식으로 기어올라갈 수 있었는가, 가더라도 효과적인 구조활동을 할 수 있었는가는 앞으로도 계속 쟁점이 될 것이다.
'지폐를 말리지 않았다'
이준석 선장의 부상 정도에 대해서 강정민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고는 16일이었고 선장을 접견한 게 게 21일, 즉 5일 뒤에 봤는데, (가슴부위의 상처가) 꿰맬 정도는 아니었다. 왼쪽 가슴 부분에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푹 찍혀서 자국이 선명했다. 엉덩이는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이상이 없다고 나왔으니 타박상이었다는 얘기다.'

이준석 선장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만든 것은 팬티를 입고 탈출, 물에 젖은 지폐를 말렸다는 보도였다. 강정민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분 인상 때문에 더 그런 오해를 받은 것 같다. 이 분은 69세로서 경험도 많고, 사건을 좀 남의 일 얘기하듯이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새벽 5시30에 일어나서 조타실에 갔다가 6시에 식사를 하고 1등 항해사와 교대, 항해사가 식사하게 하고,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는 옷을 갈아 입으러 갔다는데 아마 제복을 입으러 간 듯하다. 밑에는 팬티, 위에는 가디건 차림으로 탈출했다. 나중에 입고 있던 체육복 바지는 자원봉사자가 구해준 거라고 했다. 지갑과 핸드폰은 배에 놓고 왔다고 했다. 선장 말은 핸드폰과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기사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이야기 외에, 담요를 받은 후 아래를 두른 것 때문에, 자신의 몸은 알뜰살뜰 챙기면서 승객들의 안전은 챙기지 않았다는 식으로 완전히 악마가 됐다. 처음에 박한결 항해사를 만났는데, 한참 얘기를 하다가 '선장님은 팬티 바람으로 오셨어요. 트렁크 팬티 있잖아요'라고 했다. 그래서 담요로 아래를 가렸던 모양이다.'
'하드 스타보드'를 했느냐의 문제
또 다른 쟁점은 선장이 조타실을 비운 시간이다. 선장은 10분 정도라고 하고 일부 언론은 한 시간이라고 했다. 강정민 변호사는 '병풍도 끝자락에 와서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直進(직진)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까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제주 측과 교신, 11시30분 쯤에 도착할 거 같다고 했다고 하니 그 통신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顚覆(전복) 침몰의 원인과 관련하여 이준석 선장은 變針(변침) 때의 정전說이나 화물 과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3등 항해사 朴씨는 원래 선장인 신모 씨가 한 말을 전해주더라고 한다.

신 선장은 “이 배를 완벽히 다룰 수 있는 조타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조종하기 까다로운 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조타수에게 변침 지시를 내릴 권한과 의무를 지닌 박한결 3등 항해사는, 조타수가 자신의 지시와 달리 '하드 스타보드', 즉 오른쪽으로 全舵(전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최대한 키를 꺾는 것)를 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신 선장은 5개월의 경력자인 박한결 항해사에게 방향 전환 할 때 5도 이상 절대 틀지 말라고 강조했고, 사고 당시에도 10도를 변침해야 하는데 5도씩 두 번 한 것이라고 한다. 박한결 항해사는 강 변호사에게 '조타수를 만나면 '하드 스타보드'를 했는지 물어 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강정민 변호사는 조준기 조타수도 인터뷰했다.

'조타수는 영장실질 심사 때, '내가 실수한 것도 있지만 평소보다 舵(타=키)가 많이 돌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내가 '실수'가 뭔지 물어봤다. 조타수 얘기는 '5도씩 돌렸는데, 舵(타)가 빨리 돌았고 평소보다 더 돌아갔다'고 했다. 그는 '하드 스타보드'를 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럼 실수한 건 뭐냐 했더니 타가 더 돌고 배가 기우뚱한 순간에 내가 조치를 잘못한 게 아닌가, 이 부분이 내 실수 아닌가라는 취지로 말했다. 조타수는 기우뚱 하고 선체가 기우니 반대로(왼쪽으로) 15도를 돌렸는데, 이게 자기가 대처를 잘못한 부분이 아니냐 하는 뉘앙스였다(3항사는 조타수에게 '키를 반대로 써라'는 말은 했다고 한다). 나도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물론 정상적인 배라면 35도 정도 돌리는 全舵(전타)를 해도 배가 넘어가지 않는다. 문제는 당시 세월호에 내재된 복합적 요인들이었다. 5층 증축에 의한 무게중심의 상승, 화물과적(過積)과 허술한 묶음 등의 보이지 않는 불안정 요인들이 다소 급한 변침으로 일거에 연결되어 조용한 바다에서 큰 배가 뒤집어지는, 청천벽력 같은 平海顚覆(평해전복) 사고로 연결된 것이다.
'악마는 아니었다.'
강정민 변호사는 '그들을 만나보니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했다.

'너무 마음이 먹먹한 게 이 사람들도 한 다리 두 다리 걸치다 보면 서로 아는 사람일 것이고 부모 형제 자식이 있는 평범한 국민이라는 점이었다. 3등 항해사는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다. 스물여섯 살짜리가 뭘 알겠는가. 이 사람들은 우리들의 自畵像(자화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자신들도 이런 엄청난 결과가 나올 줄 몰랐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나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선장은 1년 계약직으로 보도가 나왔는데, 사람은 받는 만큼만 일한다. 얼마만큼의 召命(소명)의식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결 3항사는 홀어머니 밑에서 산다고 한다. 조타수는 獨身(독신)으로 가족도 없었다. 69세 이준석 선장은 자식과 부인이 있다. 구속 이후에도 李 선장은 가족접견이 가능한데 자식들은 오지 않고 와이프만 와서 울다가 간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악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부인 입장에서는 남편이 온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됐는데...'
'이 사건이 한국을 바꾼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게 해야.'
'이번 사건이 政爭(정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도 작년부터 기독교 신자가 됐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이걸 통해서 뭔가 교훈을 주려 한 게 아닌가. 교훈이 뭘까. 생각을 했다. 최근에 내린 결론이 賤民(천민)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조금 더 성숙한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한 단계 성숙된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사건이 政爭으로 이용되면 이런 기회가 무산되어 버린다. 100년 후, 세월호 사건이 대한민국을 완전히 바꾼 5大 사건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이게 대한민국을 체질적으로 개선한 터닝 포인트가 되어야 한다. 세월이 지나면 잊힐 것이라며 패배주의적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2048년 대한민국 建國 100주년을 기념해서 대한민국을 바꾼 5大 사건을 뽑는다면 이 사건이 들어가게끔 노력해야 한다. 대한민국 자체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언론이 해줘야 한다. 그 동안 한 마디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해 왔다. 이젠 '선하게 벌어서 선하게 쓴다'로 바뀌어야 한다.'

'영국은 각자가 자신의 義務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의무, 명예, 조국(Duty, Honor, Country)'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모토이다. 조국보다 의무를 더 강조한다. 애국심보다 의무감을 더 앞세운 것이다. 장교의 명예심과 애국심은 의무를 다할 때만 증명되는 것이다. 의무를 다함은 애국의 구체적 표현이다.

1805년 10월21일 영국과 유럽의 운명을 건 트라팔가 海戰(해전)을 앞두고 호레이셔 넬슨 영국 제독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싸우러 나가는 영국 함대에 유명한 명령을 내린다. 신호 깃발로 전해진 명령은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였다. 원래 넬슨은 신호 담당 장교 존 파스코 중령에게 'England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고 지시했는데 파스코 중령은 confides(믿는다)를 expects(기대한다)로 교체할 것을 건의, 허락을 받았다.

<영국은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는 이 명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英軍(영군)이 이기고 넬슨이 戰死(전사)한 뒤 유명해졌다. 原文(원문)은 조금씩 가필 수정되었다. 'England expects every man to do his duty'로 달라진 문장이 퍼지는 바람에 세인트 폴 성당에 있는 넬슨의 무덤엔 그렇게 써져 있다. 1811년 존 브라함이란 테너 가수가 '넬슨의 죽음'이란 노래를 작곡, 유행시켰는데, 이 문장이 들어갔다.

군사문화의 精髓(정수)를 이어가는 영국의 海軍(해군)과 미국의 陸軍(육군)이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전투라는 비상 상황에선 전투원이 各自(각자)의 의무를 다하는가의 與否(여부)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 사병이나 말단 직원이라도 문제가 생기는데 대통령, 장관, 장군, 사장, 선장이 그러할 경우엔 대참사가 일어난다. 義務는 의로운 일에 힘쓴다는 뜻이다. 의무를 다하는 것이 正義이다.
나는 나의 職務를 다하고 있는가?

세월호 침몰의 과정을 살펴 보면 任務(임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고 이것이 人命희생을 결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船社(선사) 경영자는 짐을 규정대로 싣지 않아 안전운항의 의무를 버렸다.
2. 船長(선장)은 맨먼저 배를 버리고 달아나 救難(구난) 지휘의 의무를 위반하였다.
3. 1등 항해사는 규정을 위반한 貨物積載(화물적재)를 눈감아 주어 1당 항해사의 職務(직무)를 어겼다.
4. 海運(해운) 관련 공무원들은 안전운항을 위한 규정이 실천되고 있는지를 감독해야 할 의무를 버렸다.
5. 海運 담당 기자들은 沿岸(연안)해운의 문제점을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언론의 임무를 버렸다.

위의 다섯 단계에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의무를 다하였더라면 세월호 침몰은 막을 수 있었다. 수많은 직업이 서로 연결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는 직업 윤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瓦解(와해)된다.

세월호 사건은 '나는 나의 직무를 다하고 있는가'라는 話頭(화두)를 던졌다. 안전을 위한 새로운 정부 조직을 만들고 책임자들을 감옥에 보내도 규정과 의무를 지키지 않는 풍토에선 사고를 막을 수 없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옳다. 특히 남탓의 전문가들인 기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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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변호인朴正熙 전기(全13권)趙甲濟의 現代史이야기(全14권)
[ 2014-05-14, 16:19 ] 조회수 : 2867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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