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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6일 화요일

독립 시켜준 일본에 감사하라

독립 시켜준 일본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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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라는 말 자체로써는 나쁜놈이 아닌데요. 친미,친중,친북파는 나쁜의미가 별로 없는데, 어찌 친일파는 매국노라는 의미가 들어 있을까요?  

웃기는건 팔로군은 엄연히 중공군이며, 그 틈바구니에 조선인이 끼어 있었지요. 당연 일본군에도 조선인이 끼어 있었지만, 이야기는 달리 해석 됩니다. 중공군에 끼어 있던 조선놈은 독립군이고, 일본군에 끼어 있던 조센징은 친일파 매국노? 오히려 저는 일본군에 끼어 있던 조센징이 독립군이고, 중공군에 끼어 있던 조선놈은 친중 공산파 매국노로 봅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중제 독립을 기념하여  독립문은 있어도, 원폭투하로 일제 독립을 기념하는건 없지요.
일제의 독립 이전까지만 해도 조공과 공녀로 받쳤던 일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종군위안부는 날이갈수록 더해집니다. 조공녀는 인간제물이며 종군위안부는 창녀로써 신분이 엄연히 다릅니다.

독립문 코앞에 있는 영은문의 초석은 왜 뽑아 버리지 않을까요?  일제잔재는 다 폭파 해버리면서............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이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것에 대해 일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건립된 것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르다. 지금도 독립운동 탄압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자리에는 독립공원이 조성되어있으며, 바로 옆에는 독립문이 서 있어 독립의 의미를 구분하는 데 혼란을 주고있다.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독립문 쪽으로 내려다보면 3.1독립선언 기념탑이 있다. 이 탑 아래로 오른손 에는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 동상의 뒷 모습이 보인다.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 하였으며 독립협회를 결성한 민족의 선각자라 일컬어지는 서재필에 대한 추앙은 아직까지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평가 받아야 할 인물.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서재필은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탈출한다. 여기까지가 그가 서재필로 살아온 날들이다. 이후로는 철저히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살아갔다. 상명여대 주진오 교수는 "서재필이 쓰기나 말하기 모두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점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진오 교수의 글에 따르면 그가 조선 정부에 의해 추방될 당시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 이라 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조선은 "내 나라"가 아니라 "너희 나라"인 것이다.

1896년, 중추원 외부의 미국인 고문으로 귀국한 필립 제이슨(서재필)과 정부대신 이완용 등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그 첫 사업으로서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을 건설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기 전이라 자주독립국 이었음이 분명한데 왜 독립이라는 말을 썼을까.

그 이유는 두가지. 첫째는 중국사신을 맞이 하던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점과 둘째는 독립문 건설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가 "조선이 몇 해를 청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으로 독립하였다."고 기뻐한 사실이다.

독립협회는 '조선독립을 기념할 근거'를 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두고있다. 조약문에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결국 독립협회가 감사한 '하느님'은 일본인 셈이다. 이 점은 1898년 8월,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왔을 때 독립협회가 그를 '한국의 독립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데서도 알수 있다.

상식적으로 독립협회는 "외국 의존을 반대하는 애국자들이 모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표방하여 결성"한 것이다 . 그러나 간판격으로 내세우는 이상재,주시경 선생을 빼면 거의 모조리 친일 인사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일병합이 있은 지 열흘 뒤 일본은 조선 침략에 공이 큰 자들에게 돈과 귀족작위를 주게되고 거의 모든 독립협회의 간부들이 일본의 합방공신으로 인정 받았다는 사실에서 독립협회의 실체가 드러난다.

독립협회가 나라의 운명이 기울던 구한말, 서구의 선진 사상을 소개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역사적으로 어떤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것처럼 '자주독립. 자유민권, 자강개혁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수있다.

또한 지난 1999년에 출간된 <이완용 평전>이라는 책에 보면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 하나를 지적했다. 독립문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이완용이 쓴 것이 백 퍼센트 확실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글씨체가 굵고 힘있는 이완용의 전형적인 필체이며, 그는 당대 제일의 명필로서 이미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쓴 경력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한 이완용은 그 당시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으로서 독립문 건립 사업을 주도했다는 것도 다른 이유였다.

그런데 참으로 언짢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짙다. 약간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때마침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분명히 들어 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이상의 사실에서 독립협회가 청으로부터의 조선독립과 이를 가능케 해준 일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함께 표한 것이 독립문의 '독립기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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